[정도언의 마음의 지도]침묵의 뒷모습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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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오늘은 글이 쉽게 써지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독자들께 도움이 되는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 혹시 내 글이 함량 미달이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 또 무엇이 있을까요. 정신분석용 카우치에 누워 자유연상을 하는 사람도 비슷합니다. 분석가가 내 말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런 창피한 일도, 죽을 때까지 숨겨서 가고 싶었던 사건까지도 시시콜콜 모두 다 이야기해야 하나. 그러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까.

카우치 위에 누운 몸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마음은 ‘이 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정말 문제로다’의 갈등에 사로잡힙니다. 말을 안 하고 있자니 비용을 지불하며 확보한 시간의 흐름에, 택시 뒷자리에 앉아 요금계산기에 눈이 가는 심정과 비슷하게, 초조해집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숨기지 말고 말해서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분석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부담이 생깁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오늘따라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닙니다. 의지와 달리 내 마음은 나를 분석가에게 자꾸 숨기려고 발버둥칩니다. 이러한 현상을 분석에서 ‘저항’이라고 부릅니다. 분석을 방해하는 걸림돌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흔히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분석시간에 몸은 나타나지만 마음이 반항을 해서 입을 다물고 침묵에 빠지는 행위입니다.

자, 이런 상황이 닥치면 분석가는 난감합니다. 말이 매개체인 정신분석에서 침묵이 나타나면 분석의 대상인 ‘이야기’가 없어집니다. 그렇다고 하지 않은 말을 멋대로 상상해서 분석을 진행한다면 ‘소설’이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침묵의 벽을 깨야 합니다. 말로 하니 쉬울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분석은 창의성을 필요로 합니다. 프로이트 박사는 미숙했던 시절에 환자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얹고 힘을 주고 누르면서 환자에게 말하기를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환자가 자유롭게 생각과 감정을 말로 표현하도록 내버려두는 방식, 자유연상법을 창안하면서 그런 방법은 금방 버렸습니다만.

그렇다면 분석가는 분석받는 사람이 침묵에 빠졌을 때 침묵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우선 기다려 봅니다. 이 시점에서 두 사람 사이에 일종의 힘겨루기가 일어납니다. 누가 먼저 말문을 열 것인가. 분석실에는 침묵이 흐릅니다. 대개는 분석받는 사람이 심리적인 압박을 못 이기고 말을 다시 이어갑니다. 그렇지 않고 침묵이 너무 오래가면 분석가가 먼저 말을 겁니다. “말씀이 없으시군요….” 그래도 이야기가 없으면 덧붙입니다. “말씀하시기에 거북한 생각이 떠오른 것 같습니다….” 침묵이 이어집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마도 저에 대한 어떤 불편한 생각인 것 같습니다…”라고 직전의 맥락을 읽어서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분석받는 사람이 집요하게 “떠오르는 생각이 아무것도 없네요”라고 한다면…. 경험이 부족한 분석가는 말문이 막히며 당황해합니다. 숙련된 분석가는 ‘아무 생각도 없음’에 관해, 틀림없이 떠올랐던 어떤 생각을 아무 생각도 없게 스스로 만들어 버린 행위 그 자체를 붙들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겁니다. 사실 혼수상태를 빼고는 아무 생각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잠을 자는 중에도, 특히 꿈에서는 생각이 활발합니다. 그러니 아무 생각도 없다는 말은 뒤집어 보면 특별한 생각을 했다는 말이고, 그 특별한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가 거북해서 안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분석가는 침묵의 벽을 허물기 위해 저항 자체의 분석을 힘겹게 계속합니다.

분석받는 사람이 침묵할 때 침묵을 해소시킬 수 없다면 분석은 저항의 늪에 빠져 멈춥니다. 심하면 몇 달 동안 그러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분석가는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결국 분석이 중단되고 그 사람을 다른 분석가에게 의뢰해야 하는 예외적인 경우도 생깁니다. 대개는 짧은 시간 내에 침묵의 의미가 밝혀지고 분석은 다시 활발하게 진행됩니다.

일상 대화에서도 상대방이 말을 중단하고 침묵을 지키면 내 말이나 행동에 대해 심리적인 저항을 보였다는 뜻입니다. 일상의 침묵은 비교적 의식적인 행위이지만 분석의 침묵은 무의식적인 경우가 흔합니다. 그래서 침묵의 동기나 목적을 알아내려면 전문적인 안목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를 ‘침묵의 분석’이라 할 수 있는데 침묵이라고 하는 저항의 뒤에 어떤 동기나 목적이 숨어 있는지를 찾아내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 분석이 정체상태에서 앞으로 다시 나아갑니다.

침묵의 뒷모습들을 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감추고 싶은 과거입니다. 정신분석으로 과거를 정리하고 밝은 현재와 미래를 찾고 싶어 시간, 비용, 에너지를 자발적으로 쓰는 사람도 막상 타인인 분석가에게 과거를 털어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을 말하는 자체가 싫고 고통스럽습니다. 거기에 수치심이나 분노의 감정이 겹치면 더욱 어렵습니다.

둘째, 성적 욕구나 환상을 자유롭게 표현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부끄러움은 침묵으로 이어집니다. 분석 과정에서 분석받는 사람은 분석가에게 가까워지고, 의존하고, 배려 받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마음이 성적 환상으로 나타나면 깜짝 놀라면서 침묵으로 덮어버리려 합니다.

셋째, 공격성입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분석받는 과정에서 그동안 친하게 지내던 사람을 죽도록 마구 패주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그동안 눌려 있다가 새롭게 찾아낸 내 안의 공격성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침묵으로 연결됩니다. 분석가는 분석받는 사람이 말 대신 표정, 자세, 몸짓, 움직임 등으로 몸을 써서 하는 이야기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애를 씁니다.

저항을 해소시켜 진행하려는 정신분석과는 반대로 저항을 강화시키는 것이 목표인 치료법들도 있습니다. 안심시키고 격려하고 덮는 방법들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잊으세요” 등입니다. 뿌리는 건드리지 않고 잎이나 잔가지만 좀 정리하는 방법입니다. 시간, 비용, 에너지를 아끼려면 이렇게 해도 증상 해소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근본을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계속 덮기만 하다가 문제를 더 키우기도 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침묵의 뒷모습#심리적 저항#침묵의 분석#감추고 싶은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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