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임원 A 씨(45)는 최근 한 외국 잡화 브랜드를 수입하려다 낭패를 봤다. 상대 회사의 계좌번호가 담긴 e메일을 해킹당해 엉뚱한 곳으로 돈을 보낸 거다. 액수는 크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A 씨는 “계좌번호처럼 중요한 사안은 상대방과 전화하면서 육성으로 확인하고 수기(手記)로 받아 적었어야 했는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미국 월가 헤지펀드에서 일한 수학자 캐시 오닐이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의 폐해를 파헤친 책 ‘대량살상 수학무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남부 아칸소주에 사는 캐서린 테일러는 이유 없이 취직과 주택 보조금 신청을 거부당했다. ‘테넌트 트래커’라는 값싼 자동 데이터 수집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단지 테일러와 이름과 생일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한 마약사범을 평범한 주부로 잘못 인식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오류는 ‘인간의 관여’로 바로잡혔다. 테일러는 연방정부 직원을 직접 만났고 해당 직원이 일일이 신원 오류를 수정해줬다. 이를 통해 디지털 세상에서도 자신의 신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정보기술(IT)의 급격한 발전에 따른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이 디지털의 약점을 보완하는 수단이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던 아날로그 방식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미 해군 범죄수사국 소속 특수요원들의 활약상을 다룬 인기 미드 NCIS를 보자.
최첨단 범죄 수사의 특성상 NCIS 요원들은 IT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그런데 개성 강한 특수요원을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으로 이끄는 주인공 리로이 제스로 깁스는 ‘컴맹’에 ‘기계치’다. 폴더폰만 쓰는 ‘아날로그파’ 깁스의 위력은 시즌 7의 8화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한 인터넷 보안업체에 괴한들이 침입해 총격전이 발생한 상황에서 여성 해군 중위 1명이 숨진다. 범인들은 도주 도중 의도적으로 워싱턴 전역의 정전을 유도한다.
손전등, 폴라로이드 카메라, 등사기(謄寫機) 등 구닥다리 기계로만 범인을 잡아야 하는 상황. 등사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젊은 팀원들은 쩔쩔맨다. 반면 깁스는 능수능란하게 범인의 몽타주를 복사하며 범인을 잡는다. 정전이 해결되자 팀원들은 컴퓨터와 휴대폰으로 밀린 e메일을 체크하지만 깁스는 컴퓨터를 끄고 사무실을 나선다.
뉴욕타임스(NYT) 인기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색스는 최근 출간한 ‘아날로그의 반격(The Revenge of Analog)’에서 “최근 몇 년간 미국 내에서 종이 책, 수첩, 일회용 카메라, LP판, 보드게임 등 아날로그 기기 판매가 꾸준히 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실리콘밸리에는 낮에는 컴퓨터 코딩 업무를 하지만 밤에는 LP판을 모으고 수제 맥주를 즐기며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하는 신(新)인류가 많다. 이것이 음양(陰陽)의 조화가 아니겠는가”라고 분석했다.
구글은 몇 년 전부터 자사 웹디자이너에게 새 임무를 맡길 때 펜과 종이를 사용한 브레인스토밍을 먼저 시킨다. 여기서 나온 훌륭한 아이디어를 대형 스크린에 구체화하는 게 낫다는 이유다. 즉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둘을 잘 조화시키는 일은 그 어떤 인공지능(AI)이나 슈퍼컴퓨터가 아닌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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