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력 집중을 해소하겠다는 정부 강공 드라이브가 이어지면서 대기업들이 바짝 엎드렸다. 보수 정부 시절 혜택을 본 대표 집단이란 낙인이 대기업에 붙으면서 운신의 폭은 이미 극도로 좁아졌다.
정부는 대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펴면 부(富)의 분배가 악화될 것을 우려한다. 이런 기조를 바탕으로 △대·중소기업 격차 완화 △노사 상생 및 노동계 권익 보호라는 두 가지 원칙을 경제 정책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문제는 지금처럼 당근 없이 채찍만 가하는 정책이 계속되면 자칫 경제 활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잖다는 점이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기업 정책이 오락가락하면 나중에 친(親)기업 정책을 편다고 해도 효과가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강해지는 대기업 압박 시그널
경제 부처 중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곳은 공정거래위원회다. 자산 5조 원 이상 대기업 공익재단 조사에 착수한 게 대표적이다. 대기업 총수 일가가 공익재단으로 세금도 감면받고 편법적으로 그룹을 지배한다는 비판이 나오자 메스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조사가 끝나면 공익법인의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는 정책을 만들 수 있다는 뜻도 내비쳤다.
공정위는 21일에는 ‘합병 관련 신규 순환출자 금지 제도 법 집행 가이드라인’을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건을 겨냥한 것으로 과거 정부에서 공정위가 삼성에 유리하게 법을 집행한 것을 바로잡겠다는 취지다.
이 결정으로 삼성SDI는 합병으로 ‘강화’가 아닌 ‘신규형성’된 삼성물산 주식 404만2758주(2.1%)를 추가로 매각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재계 관계자는 “이 물량이 시장에 그냥 나오면 가격이 폭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블록딜 형태로 처리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1심 법원 판결에 따른 것으로 정부가 더 이상 대기업에 우호적인 환경을 제공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중소벤처기업부도 압박에 나섰다. 홍종학 중기부 장관은 이날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탈취 문제를 ‘1호 정책’으로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중기부는 공정위, 특허청, 경찰청 등이 참여하는 태스크포스(TF)를 복원해 운영하기로 했다. 홍 장관은 “대기업 관계자들은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이해가 없다.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 “기업 환경 악화” 우려 높아져
대기업을 조준한 정책들은 이미 상당수가 진행되고 있다. 위력이 가장 큰 정책 중 하나는 법인세 인상이다. 내년부터 과세표준 3000억 원 초과 기업 법인세율이 최고 22%에서 25%로 3%포인트 올리는 법의 개정안이 최근 국회에서 확정됐다. 여기에 기업 세 부담을 덜어줬던 연구개발(R&D) 세액공제도 축소되는 등 대기업에 대한 압박은 전방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정부는 “경제성장의 과실이 대기업에만 집중되고 있다”며 세율 인상을 강행했지만 이는 세계적인 추세와는 거리가 멀다. 미국 의회가 20일(현지 시간) 법인세 최고세율을 21%로 낮추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영국, 프랑스, 일본 등도 감세 정책에 나서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투자 유치 경쟁에서 기업들에 당근을 제시하겠다는 생각에서다. 미국 법인세 감세안이 발효된다는 소식에 미국 통신사 AT&T는 직원 20만 명에게 보너스를 1000달러씩 주겠다고 밝혔다. 미국 최대 케이블TV사 컴캐스트는 향후 5년간 5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정부 압박이 강해지면서 대기업들은 궁지에 몰리는 형국이다. 반도체를 제외한 다른 업종은 정체에 빠져 있어 체감도는 더욱 커질 가능성이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1∼3분기(1∼9월) 누적 국내 제조업 상장사 실적을 분석한 결과 전기전자 업종을 제외한 분야의 매출과 영업이익 성장률이 한 자릿수(전년 대비 6.2%, 8.4%)에 그쳤다. 조선업은 매출이 줄었고 자동차에선 영업이익이 감소했다.
상황이 악화되고 있지만 기업들이 하소연할 창구는 마땅치 않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재계 소통 창구로 나서고 있지만 과거처럼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진 못하고 있다. 정부 관료들도 대기업과 소통하는 데 소극적이다. 이병태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좋은 일자리는 대기업이 만드는데 대기업을 옥죄고만 있다. 대기업에 지원책을 준다고 생각할 것 없이 글로벌 스탠더드만이라도 지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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