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연세대 의사고시 합격률 98.6%… “절대평가 통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6일 03시 00분


“공부 몰두보다 의술 제대로 익히자” 학점 없애고 절대평가 도입 4년째

연세대 의대 학생들이 심정지 환자 모형을 대상으로 심박동 측정, 정맥주사, 산소 공급, 제세동기 작동 등 진단과 치료에 대한 실습교육을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제대로 실습을 통과하면 학점 대신 ‘P(PASS)’를 받는다. 연세대 의대 제공
연세대 의대 학생들이 심정지 환자 모형을 대상으로 심박동 측정, 정맥주사, 산소 공급, 제세동기 작동 등 진단과 치료에 대한 실습교육을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제대로 실습을 통과하면 학점 대신 ‘P(PASS)’를 받는다. 연세대 의대 제공

“의대 다니면서 학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좋았어요. 하지만 꼭 알아야 할 기본은 엄격한 테스트를 통해 확실히 알게 됐죠. 그 덕분에 이번 의사국가고시를 치를 때 큰 도움을 받았어요.”(이다혜·연세대 의대 4학년)

연세대 의대가 국내 처음으로 전 과목에서 학점을 없애고 일정 수준만 되면 통과시키는 절대평가(PNP·Pass or Non Pass)를 도입한 지 4년이 됐다. 1학년 입학 때부터 PNP로 공부한 학생이 올해 초 처음 의사국가고시를 봤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PNP 도입 이후 고시 합격률이 오르고 휴학률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PNP는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공부에만 몰두하는 대신 의술을 제대로 익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연세대 의대의 성공적인 실험은 전국 41곳의 다른 의과대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 최근 5년 동안 가장 높은 합격률

본과 1학년부터 PNP로 교육을 받은 연세대 의대생 122명이 최근 치른 의사국가고시 합격률은 98.68%에 이른다. 122명 중 2명만 떨어졌다. 최근 5년 동안 가장 높은 합격률이다. 특히 합격자 120명의 평균 점수는 301.18점이다. 전체 합격자 평균 점수보다 15점이나 높았다. 연세대 의대는 2014년 의사고시 합격률이 89.3%가 나온 적이 있다. 당시 전국 의대 평균 합격률은 93.8%였다. 연세대 의대가 PNP 전환에 크게 고무된 이유다.

고시 합격률은 높아진 대신 휴학률은 크게 떨어졌다. 2017년 1학기 휴학률(군 휴학 제외)은 0.3%로 PNP 시행 이전인 2013년 1학기(0.76%)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의대생들의 휴학은 대부분 학업 스트레스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연세대 의대 송시영 학장은 “그동안 PNP를 도입하면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며 “하지만 PNP 전환 이후 학업 성취도가 높아졌을 뿐 아니라 학생들이 학점 경쟁에서 벗어나 서로 챙겨주는 협동심을 발휘해 의술을 교육하는 데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 선진국 의대에선 PNP가 대세

의대생들에게 학점은 매우 중요하다. 소위 인기 과를 선택할 때 학점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시험 관련 정보를 서로 나누기보다 혼자 알거나 일부 모임에서 독식하는 일이 흔하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 다시 무한경쟁을 하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학생들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자신의 능력과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다.

연세대 의대는 PNP 도입으로 이런 학업 환경에 근본적인 변화를 줬다. 학점 경쟁 대신 협동의 문화를 만들었다. 또 한 과목을 패스하지 못하면 2, 3번의 기회를 줘 환자에게 필요한 의술을 반드시 익히도록 했다.

송 학장은 “PNP는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문제 해결 능력과 실제 수행 능력을 향상시킨다”며 “대학이 설정한 목표 달성 여부, 자기주도 학습과 학생 상호 간 협동학습, 잠재력과 창의력, 다양성 등을 평가하는 제도”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 하버드대 등 상위 25개 의대와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 주요 의대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PNP 기반의 절대평가제도를 실시하고 있다”며 “우리는 늦게 도입한 만큼 학생들이 성취감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학습 환경과 문화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교수 1명이 5명의 학생을 지도하는 학습공동체 시스템에서 배우고 있는 학생들. 학점 대신 절대평가이기 때문에 동료와의 경쟁보다는 목표를 위해 협력하고, 서로 이끌어주는 법을 배우고 있다. 연세대 의대 제공
교수 1명이 5명의 학생을 지도하는 학습공동체 시스템에서 배우고 있는 학생들. 학점 대신 절대평가이기 때문에 동료와의 경쟁보다는 목표를 위해 협력하고, 서로 이끌어주는 법을 배우고 있다. 연세대 의대 제공

○ 다른 의대로 확산될까

연세대 의대는 PNP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절대평가 도입 이전과 이후 과목별 점수를 비교해봤다. 절대평가 도입 이후 학생들은 패스 여부만 알 수 있고, 점수는 공개되지 않는다. 절대평가 도입 이전인 2013년 근육골격계통, 기초신경과학, 순환계통, 호흡계통, 소화기학, 심장과 순환, 신장-비뇨기학, 종양학, 환경과 산업보건 등의 성적은 보통 65∼82점이었다. 하지만 절대평가 도입 이후 이 과목들의 성적이 80∼90점으로 껑충 뛰었다. 학교 측은 PNP를 실시하면서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긴 만큼 모든 학생에게 의무적으로 연구계획서를 제출하게 했다. 우수한 연구계획서를 내면 연구비를 지원했다. 그 결과 4년 동안 758편의 학생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학생들이 제1저자로 쓴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도 23건에 달했다.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 학생의 학적부에는 과목별 패스 여부만 기록돼 있다. 학점이 없다 보니 다른 병원 인턴이나 레지던트를 지원할 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한국장학재단에 장학금 신청도 쉽지 않다. 장학재단에 장학금을 신청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 학점을 유지해야 한다.

연세대 의대보다 2년 늦은 2016년 PNP를 전면 도입한 인제대 의대 이종태 학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암기된 지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다들 알면서도 현실에선 여전히 학점을 요구하는 모순이 이어지고 있다”며 “의사는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고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 PNP가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likeday@donga.com


#연세대 의대#절대평가#pnp#의사국가고시 합격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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