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연임시켰는데, 그는 나를 실망시켰다(I reappointed him, and he disappointed me).”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 패한 조지 부시 대통령은 98년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앨런 그린스펀 당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91년 걸프전 승리와 엄청난 현직 프리미엄에도 연임에 실패했다. 90∼91년 미국의 경기침체 때문이었다. 클린턴의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 슬로건은 강력했다. 이때 부시는 금리를 내리라고 수차례 그린스펀을 압박했다. 그러나 그린스펀은 인플레이션 우려가 크다며 거부했다. 부시 대통령은 그린스펀 때문에 패배했다고 두고두고 원망했다.
중앙은행장은 대통령의 정치 운명도 바꿀 수 있는 자리다. 정치인들은 경제 사정이 어떻든 금리를 낮춰 경제가 좋아졌다는 국민의 평가를 받고 싶어 한다. 금리가 떨어지면 가계와 기업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집도 사고 소비도 하고 투자도 하고 채용도 늘린다. 잔치판이 벌어진다. 하지만 중앙은행장은 후유증을 걱정한다. 무리하게 금리를 내리면 훗날 물가가 치솟고 가계 빚이 쌓이고 부실기업이 늘어난다. 정치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만은 없다. 어느 나라나 대통령은 눈치껏 말 잘 듣는 사람을 중앙은행장에 앉히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문재인 대통령이 2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유임을 결정했다. 극히 이례적이다. 청와대는 “한은의 중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에 따른 결정이라고 했다. 이 총재가 그만큼 그동안 청와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배경이 무엇이든 이 총재의 유임은 한은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이번 결정이 한은의 독립성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앞으로 이 총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연임 결정이 발표되기 두 시간 전 나는 이 총재를 만나고 있었다. 설마 연임되리라고는 예상 못 했고 퇴임 전 임기를 정리하는 그의 소회를 듣고 싶었다. 이 총재는 “2월 중순부터 이임사를 정리해 왔다”며 “4년간 가장 아쉬운 일은 임기 내내 따라다닌 ‘척하면 척’ 꼬리표”라고 했다.
2014년 9월 이 총재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가 열린 호주에서 당시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만났다. 회동 직후 최 부총리는 기자들에게 “금리의 ‘금’자도 안 꺼냈지만 ‘척하면 척’”이라고 말했다. 얼마 후 한은은 금리를 내렸고, 한은의 독립성이 의심받았다. 이 총재는 “7월에 금리 인하 신호를 보냈고 그대로 금리를 낮춘 것인데 ‘척하면 척’에 모두 묻혀 버렸다”고 억울해했다.
하지만 이 총재가 평소 좀 더 명확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시장에 던지고 예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금리를 결정했다면 억울한 오해를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총재는 그러지 못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 ‘관망 주열’, “연구를 해봐야겠다”는 애매한 발언이 잦아 ‘학생 주열’이라고 불릴 정도다.
그린스펀은 너무 오랫동안 저금리를 유지해 글로벌 금융위기의 씨앗을 뿌렸다는 비판을 받지만 미 연준의 독립성에 관해서는 역사를 새로 쓴 인물로 평가받는다. 19년간 대통령 4명의 재임기간에 연준 의장을 지내면서 정치를 고려해 금리를 결정한 적이 없다. 이 총재는 청와대와 정부에 맞서 소신을 굽히지 않고 금리정책을 펼 준비가 돼 있는가. 이 총재가 앞으로 임기 4년간 끊임없이 자문해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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