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러시아 외교관 23명 추방… 30년래 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5일 03시 00분


‘스파이 피습’ 소명 없자 보복… 모든 고위급 회담 중단-정부 인사, 러시아 월드컵 보이콧

‘이중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 전 러시아군 대령(66)의 피습 이후 영국과 러시아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는 가운데 러시아에서 추방돼 영국에서 살던 망명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또 발생해 배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스크리팔이 그의 딸과 함께 영국 솔즈베리에서 신경작용제 공격을 받은 지 8일 만인 13일 밤 한 남성이 런던 남서부 뉴몰든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자는 러시아 기업인 니콜라이 글루시코프(68)였다. 경찰은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라며 “그의 죽음은 아직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다”고 발표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러시아 소스를 인용해 “글루시코프는 자신이 크렘린의 공격 대상(hit-list)에 올라 있는 것을 늘 두려워했다. 그의 목에는 교살 흔적이 남아있다”고 전했다.

글루시코프는 ‘푸틴의 적’이었던 러시아의 올리가르히(신흥재벌) 보리스 베레좁스키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베레좁스키는 소련 붕괴 이후 항공과 미디어 분야의 큰손으로 ‘크렘린궁의 대부’로 꼽히며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후원자 역할을 했으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는 각을 세우면서 2000년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받았다. 베레좁스키는 2013년 집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고 타살 의혹이 있었지만 영국 경찰은 자살로 결론지었다. 당시 글루시코프는 “나는 내 친구가 살해됐다고 믿는다. 러시아에서 추방된 이들이 너무 많이 죽어 나가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베레좁스키와 가까운 한 인사는 “글루시코프는 명백하게 푸틴의 적이었다”며 러시아 배후설을 주장했다. 영국 경찰은 “아직 스크리팔 피습과 연계된 흔적은 없다”고 밝혔고 영국 내 러시아대사관도 “우리와 관련 없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현재 병원 중환자실에 있는 스크리팔 부녀는 여전히 중태다. 앰버 러드 영국 내무장관은 “그동안 러시아와 연계돼 죽은 것으로 의심되는 영국인만 14명”이라며 “경찰과 영국 정보국(MI5)은 과거 사건들에 대해 재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이 사건을 국제 이슈로 부각시키고 있다. 13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잇달아 통화하며 연대와 지지를 이끌어낸 메이 총리는 1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에 긴급회의를 요청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로 인해 영국이 국제사회에서 외톨이가 되고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는 계기로도 활용하고 있다.

이날 메이 총리는 또 최후 통첩한 13일 밤 12시까지 러시아의 응답이 없자 미신고 정보요원을 포함한 러시아 외교관 23명 추방 등의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영국에서 최근 30년간 가장 큰 규모의 외교관 추방이며 추방 외교관들은 일주일 내로 영국을 떠나야 한다. 메이 총리는 “영국 내 러시아 스파이 네트워크를 해체하고 간첩을 방지하는 법안을 마련하겠다”며 “영국에 입국하는 러시아인들에 대한 감시를 늘리겠다”고도 했다. 이어 러시아와의 모든 고위급 회담 및 접촉을 중단하고 현직 장관이나 왕실 인사는 6월 개막하는 러시아 월드컵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보복 조치의 효과에 대해서는 영국 내부에서도 고민이 크다. 러시아는 “영국의 어떠한 징벌적 조치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국 내 러시아 외교관 추방이나 영국의 방송통신 규제 기관 오프컴이 경고한 러시아 국영 방송사 RT의 면허 박탈 조치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영국 외교관이나 미디어도 러시아에서 똑같은 일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경제 제재에 대해서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미 2014년 크림반도 침공 이후 서방의 강력한 제재가 계속되고 있어 러시아는 잃을 게 별로 없으며 자구책 마련에 힘써 오히려 러시아 경기가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외교장관은 2018 러시아 월드컵 보이콧을 경고했지만 오히려 축구 종가 영국의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내부의 우려가 커지면서 일단 고위급 인사 불참에 그쳤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영국#러시아#스파이#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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