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느낌을 주었던 신인 늘 자기가 다 알아서 했던 노력파 그래도 여배우로 사는 게 쉽지 않구나 발버둥과 몸부림의 연속 ‘백야행’ ‘해적’ 등 다양한 장르 도전 연기도 연애도 올인 여전히 운명적 사랑 믿는 순정파
손예진은 거리낌 없이 나타나, 거리낌 없이 생각을 드러냈고, 거리낌 없이 웃었다.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맨얼굴이었다. 2000년대 중반 모 영화의 무사 촬영과 흥행을 기원하는 고사와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환한 웃음은 예뻤다. 손예진은 다시 나타나, 생각을 드러냈고, 또 웃었다. 거리낌 없었던 그는 이번에도 그랬다. 다만, 이제는 조금 찬찬한 여유가 든든하게 그의 속을 채우고 있는 듯 보였다. 많은 관객이 여전히 멜로영화의 주인공으로서 그를 기억한다. 분명 틀리지 않는다. 여기에 더 보탤 말들은 거리낌 없는 손예진이 지닌 또 다른 다채로움을 가리키고 있다. 조금 찬찬한 여유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확인시켜준다.
# 1999년 여름
대구의 고교 3학년생 손예진을 매니지먼트사 액터랜드 김민숙 대표가 마주했다. 김 대표는 당시 황신혜, 심혜진, 이미연 등 톱스타들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었다. 손예진은 이제 막 광고 일을 시작했던 때였다. 두 사람은 한 광고 에이전트를 통해 마주앉았다. 손예진을 소개받은 김 대표는 “이목구비 뚜렷하지만 아직은 어린 채 볼살이 남아 있던”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잘 따라와 주면 나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담담한 생각 밑으로는 “무늬가 짙은 느낌”이 있었다고 김 대표는 돌아봤다.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 2018년 이른 봄
손예진은 자신의 “짙은 무늬”를 또 다른 색깔로 덧입혔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라는 화폭에 색을 칠했다. 결코 잊히지 않을 첫사랑의 애틋함. 결코 떼어낼 수 없는 모성의 애틋함을 물감 삼았다. 그가 나서기 전, 한동안 멜로의 스토리는 스크린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통해 멜로 장르의 새로운 등장이라는 반가움을 관객에게 가져다주고 있다. 손예진은 조연급으로 나선 2002년 영화 ‘취화선’을 거쳐 2002년 ‘연애소설’로부터 ‘클래식’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외출’ 등을 통해 멜로영화의 대표적인 배우로서 독보적인 영역과 위상을 구축했다. 그 사이사이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작업의 정석’ ‘아내가 결혼했다’ 등 로맨틱 코미디 영화와 일련의 드라마가 더해지면서 그에게 ‘멜로 퀸’이란 별칭을 붙이는 건 이제 낯설지 않게 됐다.
그렇다고 그가 그 속에 안온하게 들어앉아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 1999년 여름
김민숙 대표와 함께 일하기로 한 손예진은 이후 한 달에 한 차례 새마을호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김 대표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와 생각을 나누었다. 대구 출신이지만 사투리는 어느새 김 대표의 귀에 크게 들려오지 않았다. “연기를 하는 데 사투리는 되도록 표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정도가 전부인데, 손예진은 “이미 자신이 다 알아서” 노력을 해왔다.
이후 3년 동안 손예진은 주변의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일과 소속사 관계자들만을 일상 주변에 자리하도록 했다. 훗날 “그 나이 때 평범한 이들이 하는 많은 걸 해보지 못했다”고 스스로 술회할 정도였다. 그만큼 아직 일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2001년 MBC ‘맛있는 청혼’으로 정식 데뷔해 스타덤에 오른 뒤 얼마 동안도 마찬가지였다.
“소속사가 뭘 엄청나게 가르치고 한 게 없다. 지금까지도 일을 앞두고 아침마다 잠에서 못 깨어난다고 매니저로부터 보고받은 적이 없다. 내가 잠을 깨워 일으킨 적도 없다. 단 한 번도!”
# 2008년 늦은 가을
“여배우로 살아간다는 게 쉽지 않구나 고민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2008년 11월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손예진은 그렇게 말했다. 예상치 못하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호명된 뒤 무대에 오른 그는 트로피를 손에 쥔 채 한껏 떨리고 상기된 표정으로 눈물을 머금었다. 국내 대표적인 영화상의 여우주연상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아내가 결혼했다’가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무대였다. 김민숙 대표는 당시 그의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고 돌이켰다. 자신이 보아온 긴 시간 안에서 그즈음의 손예진은 너무도 힘겹게 보였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배우로 열심히 해온 것 같은데 쉽지 않다. 그걸 누가 알아준들 뭐할까 싶다. 그리 한들 달라지는 건 또 뭔가.”
손예진은 데뷔 이후 처음으로 김 대표에게 자신의 힘겨움을 털어놓았다. 배우로서 살아가는 현실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구도 함께 나누지 못할, 깊은 슬럼프의 수렁과도 같은 외로움과 힘겨움의 속내를 드러냈다. 상은 마침 그에 대한 작은 보답이 되었지만, 그는 이를 ‘더 잘 하는 배우로 살아가라’는 지침으로 받아들였다.
# 2008년 늦가을부터 2018년 이른 봄
손예진은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20대에 가졌던 감정과 느낌에서 객관적으로 멀어진 채 작업한 무대로 꼽는다. “버티면서 잘하고 싶고, 그저 열심히 하려 했던” 20대를 보내고 이제 “감정의 과잉도 없고, 여백이 많아서 (보는 이들이)물 흐르듯 따라갈 수 있게 하자”고 다짐하게 한 작품이다. 10여 년 전 겪었던 힘겨움의 과정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생각은 아닐까. 이를 두고 손예진은 “발버둥과 몸부림”이라고 말했다. 그것 또한 누가 가르쳐 준 건 아니었던 듯 싶다.
그는 “많은 관객이 각자 생각하는 내 이미지가 있을 거다. 그러니 좋아하는 모습도 다 다를 것이고,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발버둥치고 몸부림쳤다. 그렇다보니 어느 한 순간부터가 아니라 연기를 하면서 늘 꾸준히 생각하고 고민하는 문제다.”
2000년대 멜로 혹은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비쳤던 그는 실제로 2009년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로부터 ‘오싹한 연애’ ‘타워’ ‘공범’ ‘해적: 바다로 간 산적’ ‘비밀은 없다’ 그리고 2016년 ‘덕혜옹주’에 이르는, 그야말로 장르와 스토리를 넘나드는 다양한 무대를 선택했다. 대체 여린 감성만을 드러내는 데 특장을 갖췄다고 얼핏 생각한 관객은 미스터리와 사회물과 심지어 액션에 이르는 그의 다채로운 색깔과 무대에 다시 한번 놀랐다.
# 2018년 이른 봄부터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한 아이의 엄마로도 등장하는 손예진은 영화에 빗대 이렇게 말했다.
“아직은 내가 엄마가 되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다. 부족한 게 많고, 또 내가 누군가를 챙겨 줄 정도의 사람일까? 아이가 있으면 아마 올인할 것 같다. 안 해 봐서 모르겠지만. 하하!”
사람을 향한 올인! 아마도 순정함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수사일까. 손예진은 그렇게 운명과 인연을 믿고 있다. 김민숙 대표가 이끄는 현 엠에스팀엔터테인먼트를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았던 그는 “처음 만나 처음 정을 준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있다. 서로 존중하며 믿음을 가져왔다”면서 “서로 잘 맞지 않았던 순간순간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함께 시간을 쌓아왔는데 그 끝이 있다는 건 슬픈 일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사랑의 인연도 마찬가지. “운명적 사랑을 믿는다”는 그는 “모든 것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길이 조금 다르고 가는 방향이 조금 다를 뿐이다”면서 “억지로 만나야 한다고 만날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말은 실감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전의 감정은 퇴색하는 것 같다. 만나고 좋아하고 연애하고 헤어지는 과정을 겪은 뒤 ‘정말 사랑했었나?’ 고민하게 되지 않나. 언젠가는 진짜 사랑이 뭔지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현실 속 손예진에게도 언젠가는 “진짜 사랑”이 찾아올 터. 그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운명과 인연의 소중함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채워주는 것만으로도 배우 손예진과 관객의 운명과 인연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손예진
▲ 1982년 1월생 ▲ 1999년 고교 3학년 때 광고모델로 활동 시작 ▲ 2001년 MBC 드라마 ‘맛있는 청혼’으로 정식 데뷔, MBC 연기대상 신인상 ▲ 2002년 영화 ‘취화선’,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상 ▲ 2002년 ‘연애소설’ 이후 ‘클래식’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외출’ ‘작업의 정석’ 등 멜로 및 로맨스 영화 ▲ 2003년 KBS 2TV 드라마 ‘여름향기’ 이후 ‘연애시대’ ‘상어’ ‘개인의 취향’ 등 드라마 ▲ 2008년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 2016년 영화 ‘덕혜옹주’, 대종상·올해의 영화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 여우주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