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가정 아버지 폭력 피해 탈출
센터서 자라며 닥치는대로 책 읽어… 멘토 만나 포기했던 대입 꿈 이뤄
“저도 아이들 위해 봉사” 다시 찾아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엘림지역아동센터. 꼬불꼬불한 머리털에 큰 눈망울, 짙은 피부색의 건장한 청년이 들어왔다. 익숙한 듯 벽면 서가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10년 넘게 이곳을 집처럼 알고 드나든 박정균 씨(20)다. 아동센터의 멘토를 자임한 박 씨는 “누군가로부터 늘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 도움을 주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박 씨는 13년 전 한 살 많은 형과 아동센터를 처음 찾았다. 불행했던 유년의 경험이 그들을 여기로 이끌었다.
일용직 근로자였던 박 씨 아버지는 형제가 유치원을 다닐 무렵 “육아비가 너무 든다”며 술을 마시면 폭력을 휘둘렀다. 아내고 아들이고 상관없었다. 그렇게 3년을 시달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잠든 형제를 한밤중에 깨웠다. 술에 취해 잠든 아버지 몰래 세 모자는 옷가지만 챙겨 집을 나왔다. 박 씨는 일곱 살이었다.
어머니는 형제를 데리고 역시 한국인과 결혼한 여동생 집으로 갔다. 여동생네도 넉넉한 살림은 아니어서 형제가 항상 마음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엄마가 일터에서 돌아오기까지 작은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았다. 박 씨는 그때 동화책을 가장 읽고 싶었다고 한다.
이들 형제의 숨통을 틔워준 곳이 바로 아동센터였다. 2003년 3월 문을 연 엘림지역아동센터는 마포구가 지원한 세 번째 아동센터였다. 한국인 아버지들에게서 학대 받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돕고 싶어 한 조재선 목사(57)가 운영했다.
2005년 형과 함께 아동센터를 찾은 뒤 박 씨의 삶이 바뀌었다. 박 씨는 “매일 밤 계속되는 아버지의 행패로 집이란 내게 두려운 곳이었다. 이모 집도 보금자리가 되기는 어려웠다. 그런 나에게 집의 의미를 알게 해준 곳이 아동센터였다”고 말했다.
형제는 아동센터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아동센터로 봉사활동을 하러 오는 대학생 형, 누나들과 만나는 시간을 좋아했다. 이들 멘토에게서 들은 이야기, 함께 나눈 이야기를 그때마다 공책에 적었다. 이 공책은 나중에 형제의 공부 비법 노트가 됐다. 형제는 아동센터에서 도서관처럼 꾸민 거실을 가장 좋아했다. 역사책, 과학책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구에서 무료로 지원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꼬박꼬박 들었다.
지난해 박 씨는 서울시립대 세무학과에 입학했다. 공부를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준 조 목사에게 합격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렸다. 박 씨는 조 목사에게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다문화가정 청소년들을 돕겠다고 밝혔다. 조 목사는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박 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 여겼는데 당당히 대학생이 됐다. 희망을 주는 멘토가 되겠다”며 조 목사를 얼싸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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