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부모 자식 간에도 나눌 수 없다고들 한다. 조직이 크든 작든 최고 권력자가 두 명이 될 수 없다. 1인자를 모시는 2인자의 처신은 넘쳐도, 모자라도 안 된다. 대통령 밑 부통령이든 국무총리든, 장관 밑 차관이든, 사장 밑 부사장이든, 국장 밑 심의관이든 때때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여겨지는 건 2인자라는 한계에서 비롯된다. 대통령학 권위자 폴 라이트 미국 뉴욕대 교수는 부통령을 향해 이렇게 조언한다. “1인자인 대통령의 영광은 가로채선 안 되고, (반대로) 더러운 일은 같이 나눠야 한다.” 한국의 한 전직 총리가 “‘책임 총리’는 대통령 대신 책임지는 총리”라고 정의한 것과 통한다.
그러나 2인자가 1인자의 정치적 사회적 생사(生死)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때도 없지 않다. ‘정치 이단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당선시킨 2016년 미국 대선도 그런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당시 캐스팅보트(결정권)를 쥔 중도 진영의 민심은 ‘음담패설 동영상 파문의 트럼프도 싫고, 지긋지긋한 e메일 스캔들의 힐러리 클린턴도 싫다’였다. 오죽하면 ‘덜 나쁜 악마(the lesser of two evils) 뽑는 선거’라는 표현까지 등장했겠나. 미 언론들이 “역대 어느 대선보다 러닝메이트 부통령 후보가 중요하다”고 했다. 3번 결혼했고 성추문도 끊이지 않는 트럼프의 선택은 사생활 깨끗한 정통 보수주의자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었다. ‘충동적 대통령에, 안정적 부통령’이란 상호보완 개념이다. 반면 화려한 정치 경륜이 장점인 클린턴의 선택은 여러 모로 무난한 팀 케인 상원의원이었다. 남녀 성별만 다를 뿐 유유상종(類類相從) 커플이다. 결과적으로 반(反)트럼프, 반(反)클린턴 정서의 ‘부족한 2% 갈증’을 적셔줄 2인자 대결에서 클린턴 진영이 패배한 셈이다. 51 대 49의 대결에선 그 2%가 승패를 가를 수도 있다.
여당의 ‘6·13 지방선거’ 압승 후 문재인 대통령의 이낙연 총리 공개 칭찬이 정·관가의 화제가 됐다. 문 대통령은 18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이 총리를 비롯한 내각’에 감사를 표하면서 “이낙연 총리 같은 좋은 분”이란 표현을 반복했다. 이 총리는 ‘내각의 군기반장’ 역할을 하면서, 국회에선 야당의 정치 공세를 특유의 정제된 언어로 잘 방어해왔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이웃 나라 일본의 2인자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과 대비된다. 아소 부총리는 계속되는 실언과 막말로, 안 그래도 각종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낮은 지지율을 더 까먹고 있다.
23일 타계한 김종필(JP) 전 총리 자서전엔 12·12쿠데타 다음 해인 1980년 노태우 전 대통령(당시 보안사령관)을 만난 자리에서 ‘2인자의 2대 자세’를 언급한 기록이 담겨 있다.
“첫째,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마라. 비굴할 정도는 안 되겠지만 품격을 유지하면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둘째, 있는 성의를 다해서 일관되게 1인자를 보좌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해라.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겨야 한다.”
JP는 “2인자의 처신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에게 조언을 구한 ‘신군부의 2인자’ 노 전 대통령은 나중에 1인자가 됐다. 그러나 JP는 ‘영원한 2인자’로 남았다.
JP를 2인자 삼아 최고 권력에 오르고, 그 권력을 유지했던 분들이 저승에서 JP를 어떻게 맞을지 궁금하다. 2인자의 운명이야말로 거의 예외 없이 1인자에 달려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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