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정동]집단적, 자발적 기억상실증은 이제 그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13일 03시 00분


설계 잘못을 벌주는 분위기에선 설계 역량 향상은 불가능하다
정권 바뀔 때마다 전임자 벌주니 땜질처방, 위원회 남발되는 것
政府부터 ‘정책실패 박람회’ 열라

이정동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이정동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올 4월 중순, 한 대기업에서 실패 사례 공모전을 한다는 흥미로운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좋았을 컬’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컬처(culture)의 ‘컬’자를 문장 끝에 붙인 것이다. 실패 공유의 문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가 단박에 읽힌다.

정부도 나섰다. 만연한 실패 트라우마 극복을 목표로 올 9월 행정안전부와 중소벤처기업부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실패박람회’가 대표적인 예다. 창업가들의 실패 사례도 공유하고 재도전의 기회도 돕자는 좋은 취지다. 평소 시행착오의 축적을 강조해 온 사람으로서 민간 기업의 긍정적인 움직임도, 이를 지원하는 정부의 노력도 반갑기 짝이 없다.

그러나 민간이 아니라 정부 측을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책은 정부가 내놓는 상품이다. 신제품에 정답이 없듯이 유일한 최적의 정책도 당연히 없다. 정책 처방을 요구하는 상황 자체가 매번 다를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 정책에는 그 어느 제품보다 철저하게 ‘빠른 실패(fast fail)’ 정신이 필요하다. 일단 정책 아이디어를 도전적으로 제시하고, 시행착오 결과를 솔직하게 피드백하고, 빠르게 업데이트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의 정부 정책 상황은 빠른 시행착오의 축적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신기술과 관련한 각종 규제정책은 이해집단의 장벽에 막혀 사실상 정책 공백 상태가 된 지 수년째다. 님비 현상과 케미포비아 등 국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가 산적해 있고, 고령화나 연금 문제 등 날로 심각성을 더해 가는 사회문제가 도처에 있지만, 선제적인 정책 대응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를 최근 현장을 방문했던 한 기업에서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설계 부서에서 생산 부서로 설계도를 전달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설계 도면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생산 현장을 확인해 본 결과 놀랍게도 생산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뒷이야기가 재미있다. 당연히 생산 현장에서는 적용 즉시 설계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희한하게도 보고를 받은 생산 책임자의 지시는 ‘융통성 있게 빨리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임기응변 덕택에 문제는 해결됐지만 정작 피드백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설계 부서의 역량은 조금도 늘지 않았다.

생산 책임자가 땜질식 해결책을 지시한 이유는 이전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몇 차례 유사한 일이 있었고, 정상적으로 피드백을 했지만, 그때마다 책임 소재를 가려 누군가 징계를 받고 나서야 문제가 종결되었다. 그 무시무시한 기억이 조직 전체에 흉터처럼 남았다. 그 후 문제가 있을 때마다 융통성 있게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그 트라우마의 부작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행착오가 있을 법한 도전적 설계 프로젝트에는 아무도 나서지 않고 운 나쁘게 맡게 되더라도 최대한 안전하게 벤치마킹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문화가 되었다. 시행착오를 잘못된 실패로 규정하고 벌주는 살벌한 분위기에서는 누구도 책임지고 먼저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 없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피드백 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 회사의 모습은 요즘 우리 정부의 모습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았다. 매번 선거가 끝나면 더 심해진다. 전임자의 정책을 선악의 잣대로 판단하고 관련자들을 벌주기 바쁘다. 정치적으로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이 이런 일이 20년째 반복되고 있다. 이미 루틴이 학습되었다. 책임지고 정책 아이디어를 내야 할 정책 담당자들이 도전적인 정책 과제를 기피한다. 시행착오의 기록을 남기지도 않는다. 일단 문제가 없는 것처럼 땜질식 처방을 내거나 책임을 묻기 힘든 위원회에 넘긴다.

이제 대한민국도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선진국이다. 정책의 시행착오 경험을 스스로 지워버리고 매번 새롭게 정책을 만드는 하루살이형 개도국 관행은 그만둘 때가 되었다. 집단적, 자발적 기억상실증과 결별해야 한다. 민간 기업의 시행착오에 대해 훈수 둘 때가 아니다. 정부와 정치권이 스스로 정책 시행착오를 건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기왕에 세금을 들여 ‘실패박람회’를 할 거라면 대표 주제로 ‘정책실패 박람회’를 해보면 어떨까 제안한다.
 
이정동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실패박람회#정부 정책#시행착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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