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위대한 지도자 윈스턴 처칠은 민간기업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즉 기업관(觀)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어떤 사람들은 기업을 쏴 죽여야 하는 맹수로 간주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업이 끊임없이 우유를 짜낼 수 있는 젖소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현명한 사람들만이 기업은 수레를 끄는 말이라는 사실을 안다.”
처칠이 활동했던 때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난 지금 민간기업의 역할이나 위상은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기업은 2009년 기준으로 전 세계 인구의 81%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으며 총생산량의 94%를 창출했다. 세계 10대 기업의 총매출을 합하면 경제 규모가 작은 나라 100개의 국내총생산(GDP)을 전부 합친 것보다 많다.
기업이 경제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이처럼 크기 때문에, 경제 정책의 성과는 정부가 기업 정책을 얼마나 잘하는지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기업 정책을 잘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기업관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 정부가 경제와 민생 분야에서 낙제점을 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경제 정책의 첫 단추에 해당하는 기업관이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한 포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성이 글로벌 1위 기업이 된 것은 1∼3차 협력업체들을 쥐어짠 결과다. 삼성이 작년에 60조 원의 순이익을 냈는데 여기서 20조 원만 풀면 200만 명한테 1000만 원씩 줄 수 있다.” 처칠의 분류에 따르면 홍 원내대표의 기업관은 맹수론과 젖소론이 뒤섞인 것이다. 현명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업관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정치인의 말이라는 게 때와 장소에 따라 절반쯤 깎아서 듣기도 하고 더해서 듣기도 해야 하는 것이어서 홍 원내대표의 말에 지나치게 시비를 걸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정작 걱정스러운 대목은 현 정부가 내걸고 있는 핵심 정책들이 ‘현명하지 못한’ 기업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참여연대 출신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주도하고 있는 경제민주화 정책들은 대기업이라는 존재를 ‘을(乙)을 착취하고 압박하는 부당한 갑(甲)’으로 상정한다. 이 틀 안에서 보면 기업, 특히 대기업은 한시도 눈을 떼선 안 되는 감시와 개혁의 대상이다. 이 맹수(대기업)를 때려잡으려면 때때로 엘리엇과 같은 해외 투기자본의 편을 들어주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국민연금이 도입하기로 한 스튜어드십 코드도 제도 자체보다는, 기저에 깔린 이런 발상과 정서가 위험한 것이다.
경제민주화 정책이 맹수론적 기업관에서 나온 것이라면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정책은 젖소론적 기업관 위에 서 있다. 노동생산성이 떨어지거나 말거나, 2년간 29%라는 인상 폭이 과하거나 말거나 정부가 인상률을 결정하면 기업은 군소리 없이 따라야 한다. ‘대기업 젖소’는 그래도 견딜 만하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아우성은 마른 젖을 쥐여짜이는 고통에서 나오는 비명이다.
전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경제민주화 정책이나 최저임금 파격 인상을 앞세운 소득주도 성장론처럼 잘못된 기업관에서 파생한 정책으로 경제가 살아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경제가 잘 돌아가고 민생이 윤택한 나라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세금 부담을 낮추고 규제를 풀어 기업이 마음껏 뛸 수 있게 해주는 곳들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