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의 마음의 지도]가족과 개인 사이 ‘상처’가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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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
추석 연휴를 잘 보내셨나요.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는 일은 좋은 일이지만 늘 좋기는 어렵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경험일 겁니다. 가족(家族)은 “부부를 중심으로 한집안을 이루는 사람들”인데 피가 섞인, 유전자를 나눈 사이입니다. 그러니 물보다 진한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평소에 관찰하고 경험한 소견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서양에 비해 국가의 정체성보다 가족의 정체성이 더 강한 나라로 판단됩니다. 추석에 가족으로서 모여 얼굴을 보고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고 대화를 한다는 행위는 정서적으로는 아마 헌법보다도 상위에 있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추석에 먼 길을 오랜 시간 고생을 참고 달려서 모입니다.

오랜만이니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인사와 안부 정도는 큰 부담이 없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늘 문제입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개인과 개인 간에는 신체적 경계는 물론이고 심리적 경계가 있습니다. 함부로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지면 안 되는 것처럼 예민한 개인적 문제를 마구 묻거나 미리 판단해 말하는 일은 가족 간에도 마음의 상처를 남깁니다.

상처를 주는 단골 메뉴는 결혼, 취직, 진학같이 매우 개인적이고 예민한 문제입니다. 가족으로 보면 결혼이 대를 잇기 위한 행위이기도 하나 개인으로서는 평생 마음과 몸을 맡길 내 ‘반쪽’을 찾는 매우 중요한 일이니 아무리 가족이어도 쉽게 언급할 화제가 아닙니다. 진학이나 취직 역시 당사자에게 가장 고민인 일이니 자발적으로 의견을 묻고 도움을 청하기 전에는 가족 모임이라도 삼가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예민한 문제들이 가족 간에 쉽게 입에 오르게 될까요.

가족은 남이 아니라는 생각이 너무 지배적이면 개인과 개인 간의 경계가 지켜지지 않습니다. 남이 아니니, 내가 늘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이야기이니 이 정도는 허용된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윗분들의 마음에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아랫사람들이 이미 다 커 버린 성숙한 어른이라는 지각이 확실하게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점도 문제의 원인입니다. 내가 나이가 들 때 상대방도 나이가 든다는 명확한 사실을 잊어버린 겁니다.

가족과 가족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정립하기 위해 참고로 정신분석에서 분석가와 분석을 받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변화해 왔는지를 살펴봅시다.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분석가가 분석을 받는 사람(피분석자)에게 함부로 자신의 견해에 따라 영향을 주면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분석가는 마치 거울과 같이 피분석자의 마음을 비춰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분석가 자신이 분석을 받아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고 드러난 취약점을 해결해야 함은 물론이고 분석 시간에도 최대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통제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생각은 현대 정신분석에서 많이 수정되었습니다. 이제는 감정이나 생각의 통제는 어차피 불가능하니 역으로 그것들을 제대로 인지하고 분석의 도구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요약하면 정신분석은 피분석자의 무의식과 분석가의 무의식이 소통함으로써 진행됩니다. 따라서 분석가의 일방적인 해석이 분석 효과에 절대적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던 입장에서 아직도 해석이 중요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도 큰 역할을 하는 쪽으로 변화했습니다.

피를 나눈 가족이 다른 가족의 일에 어떻게 관심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이 개인의 심리적 경계와 방어 체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대화법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가족이어서, 윗사람으로서 일방적으로 툭 던지는 말은 비수같이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칼로 입은 상처는 봉합이 가능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쉽사리 낫지 않고 때로는 곪아 터집니다.

대가족으로서 조부모, 부모, 자식들이 모여 오래 살던 시절에는 오해가 생겨도, 섭섭한 일이 있어도 풀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매일 얼굴을 보는 사이여서 이해의 폭도 넓었습니다. 속상한 일이 생겨도 “그분은 원래 그러시니…” 하며 접어 버리면 편안하게 잊어졌습니다. 이제는 핵가족도 아니고 1인 가족의 시대이니 가족이라고 해도, 친구나 이웃이 친근하고 어쩌다가 만나는 가족이 낯설기도 합니다. 그런 서먹하고 어색한 관계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특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던지는 한마디 말은 예상치 못한 폭탄처럼 터집니다. 가족이 폭탄이 된다면 정말 불행한 일이 아닐까요. 남처럼 쉽게 헤어질 수도 없는 관계이니 더욱더 큰 부담이 됩니다.

결론입니다. 당사자가 스스로 말을 꺼내기 전에는 아무리 입이 간질거려도 참기로 합시다. 참기가 어렵다면 양해를 구하는 말을 전반부에 먼저 꺼내고, 눈치를 보다가 별문제가 없을 것 같으면 후반으로 들어가는 2단계 전략이 필요합니다. 급하게 먹은 밥이 체하는 것처럼 급하게 꺼낸 말도 늘 후유증을 불러옵니다. 가족은 소중한 관계이지만 소중한 관계일수록 치밀한 유지 관리가 필요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
#가족#경계#관계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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