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주 유럽 순방에서 얻은 최대 성과는 “두려워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격려였을 테지만, 프랑스의 보수 일간지 르피가로에서 뜻밖의 선물도 받았다. 파리정치대 교수이기도 한 저명 언론인 르노 지라르가 쓴 ‘한국 대통령의 용기’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칼럼은 문 대통령의 평화 프로세스, 나아가 대북제재 완화 주장에도 전폭적인 지지를 나타냈다.
“문재인은 순진한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카다피의 몰락을 지켜본 김정은이 확실한 보증 없이 하루아침에 핵무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용주의자 문재인은 이걸 완벽히 이해했다. 이제 그는 서방이 제재 완화를 통해 북한에 상응하는 제스처를 취하도록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가 옳다.” 국제사회에 대북제재 완화론을 설파했지만 그다지 공감대를 얻지 못한 문 대통령에겐 큰 위안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칼럼은 이렇게 끝맺는다. “(샤를) 드골 장군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외교에선 때때로 큰 위험을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바로 문재인이 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미 역사에 들어섰다.” 프랑스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드골 전 대통령에 견준 최고의 헌사였다. 한데, 바로 그 대목이 의미를 곱씹게 만들었다. 왜 하필 드골의 외교인가.
불굴의 전사였던 드골은 외교에서도 비타협적 강경 독자 노선을 폈다. 드골은 늘 앵글로색슨, 미국과 영국이 프랑스를 이류 국가로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독자적인 핵무기를 보유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통합지휘체계에서 탈퇴한 것도 이런 편집증 같은 인식에서 비롯됐다. 그런 ‘자존심 외교’는 국가 명성을 끌어올렸고, 이후 전통처럼 굳어졌다.
프랑스 언론의 칼럼 하나에 문 대통령이 고무됐을 리는 없겠지만, 최근 거침없는 남북관계 행보를 보면 묘하게도 드골의 ‘마이 웨이’를 연상시킨다. 유럽 순방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는 자평에서, 그리고 국회 동의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한 평양공동선언 비준에서,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것은 끝까지 밀고 가겠다는 드골 같은 태도가 엿보인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요즘 문 대통령 심기를 이렇게 전했다. “대통령은 낙관적이다. 참모들이 걱정을 말하면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큰 틀에서 맞는 길로 가고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는 것 같다.” 이런 대통령의 자기 확신이 남북관계 속도전으로, 그리고 미국을 향해선 ‘이젠 잡아끄는 데 지쳤다. 먼저 갈 테니 알아서 해라. 결국 우리를 따라오겠지만…’이라는 자세로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연내 종전선언과 김정은 답방이라는 시간표를 짜놓은 문 대통령이나 정부로선 마냥 미적대기만 하는 듯한 미국에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그래선지 요즘 ‘동맹 피로감’을 거론하는 얘기가 부쩍 늘었다. 일각에선 “한국은 언제까지 한미동맹의 을(乙)이어야 하느냐”며 미국의 ‘갑질’도 거론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드골의 길’은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물론 문 대통령 스타일로 볼 때 드골식 외교를 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처지를 당시 프랑스와 비교하는 것부터가 당치 않다. 하지만 혹시라도 대통령이나 주변에서 그런 독자 노선에 끌렸다면, 드골 외교를 놓고 지금껏 이어지는 논란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드골의 NATO 이탈은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원했던 동서 진영 사이의 조정자 역할은 물론이고 서유럽 지도자로서의 역할마저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콧대 높은 프랑스라는 이미지와 함께. 그리고 프랑스는 2009년 다시금 NATO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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