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천광암]세상에 나쁜 규제는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2일 03시 00분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영국은 마차업자를 보호하려고 ‘붉은 깃발법’을 만들었는데 결국 자동차산업에서 뒤처지고 말았다.” 올해 8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이후 붉은 깃발은 현 정부의 규제개혁을 상징하는 키워드가 됐다.

문재인 정부는 이전의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와 이념적 성향은 크게 다르지만 규제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는 비슷한 점이 많다. 규제를 경제성장과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보는 기본 인식은 물론이고 대통령이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관료들을 질책하는 모습도 닮았다. 3개의 정권에 걸쳐 대통령이 나서서 진두지휘하면서 규제와 전쟁을 벌여 오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기업 현장에서는 그 성과를 전혀 체감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20세기 초반 자동차 보급이 급증하면서 자동차산업의 본거지인 디트로이트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는 마차와 자동차가 뒤엉켜 마비되기 일쑤였다. 면허제도나 음주운전 규제가 아예 없었기 때문에 술에 만취한 초보 운전자들이 보행자를 덮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자동차에 대한 일반인의 반감도 컸다. 대중의 분노 앞에서 위기에 처한 자동차산업을 구해낸 것은 규제였다. 정지신호 횡단보도 일방통행 운전면허제도 등 규제 수단이 등장하면서 도로는 질서를 찾았고 자동차산업은 고속성장을 이어갔다.

규제 중에는 이처럼 유익한 것도 많다. 규제가 전봇대와 손톱 밑 가시, 붉은 깃발처럼 흉물스럽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규제개혁보다 손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규제는 국민건강 증진, 빈곤층 보호, 환경 보전, 회계 투명성 강화 등 그 나름의 공익적 명분을 갖고 있다는 데서 규제개혁의 어려움이 비롯된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애완견의 이상행동은 주인의 잘못된 훈육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규제 또한 문구 자체보다는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한국은 개별 규제를 등록 심사 관리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훌륭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현재 정부가 운영하는 규제정보 포털에는 ‘규제혁신으로 달라지는 생활, 바로바로 알려드립니다’라는 설명이 붙은 ‘규제혁신톡(Talk)’ 코너가 있다. 이 코너에는 현재 시행 예정인 사안으로 16건이 올라와 있는데 이 중 6건이 카지노 전산시설 검사의 행정절차 변경에 관한 내용이다. 이 내용이 과연 생활을 바꿔 놓을 혁신 사례로 홍보할 내용인지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해가 안 된다. 좋은 시스템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에게 진정성이 없으면 이렇게 내용 없는 건수 채우기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기업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은 공무원 한 명 한 명이 살아있는 규제라고 한다. 법으로 조문화된 규제는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많을 때도 2만 건이 넘지 않는다. 이에 비해 공무원 수는 106만 명에 이른다. 현 정부가 규제개혁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려면 이들에게 정책의 우선순위에 대한 일관되고 지속적인 메시지를 주고, 경제 살리기에 전력투구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규제개혁 회의를 통해 부처별 계획이나 실적을 점검하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이다.

문 대통령은 9일 공정거래위원회 등 6개 부처가 참여한 가운데 공정경제전략회의를 주재했다. 겉포장은 공정경제지만 실상은 대기업 때리기로 변질되기 쉬운 내용들이다. 106만 규제 본능에 “더 모질게 깨어나라”는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규제개혁#공정경제#대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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