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늘 주문하는 책이 있다. ‘한 해를 정리하는 100가지 질문’을 담은 독립출판물, ‘연말정산’이다. 1년 동안 벌고 쓴 돈을 정산하듯, 지나간 시간을 기록해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백문백답 노트다. 이 책 속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핸드폰 사진첩엔 없는 기억들이 떠오른다. ‘올해 나는 일부러 ___을 모른 체 했다’ ‘가끔 ___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훔쳐보곤 했다’ 빈칸을 채우는 게 숙제다. 돌아가며 이야기하기 좋아 송년회 때 자주 들고 갔다.
올해도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 그 책 있냐고 물어서 별 생각 없이 꺼냈다가 얼굴이 붉어졌다. 빈칸인 줄 알았는데 빼곡히 무엇인가 적혀 있었다. 모든 칸에 비슷한 이름이 등장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던 시절이었나. 올해 무엇을 깨달았냐는 물음에 ‘사랑은 구걸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적혀 있어서, 친구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2개를 마련했다. 공개적으로 일기 쓰는 것에 익숙하지만, 가끔은 취약한 진심을 기록할 공간도 필요하니까. 질문은 매년 조금씩 업데이트 된다. 신조어인 TMI(Too Much Information의 약자.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뜻한다)와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언팔(SNS에서 상대방을 끊는 행위) 등이 눈에 띄었다. 개인적으로 ‘올해 들었던 최고의 TMI’는 김무성 의원이 처녀자리라는 것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생일이 6월 14일 키스데이라는 것인데 여러분의 무엇인가요?(TMI 죄송합니다.)
첫 장을 펼치자 인생 그래프가 나왔다. 2018년은 내 인생의 상승기일까 침체기일까. 아직 정점을 찍진 못했으니 쇠퇴기는 아닐 거라고 위로해 본다. 하지만 동갑내기 방송작가 김모 양은 아닌 듯 했다. 1년 만에 만난 자리에서 밥 먹다 말고 울음을 터뜨렸으니 말이다. 내 인생의 리즈시절은 끝난 것 같다고. 어제는 붙을 줄 알았던 면접에서 떨어졌고, 오늘은 소개팅에서 만난 이상형에게 정중히 거절당했다고 했다. 그게 그렇게 울 일인가. 하지만 듣다 보니 사건 그 자체보다, 서른 살 여자라는 실체 없는 두려움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럴 필요 전혀 없다고, 별 거 아니라고 타이르자 그제야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런데 넌 왜 안 무서워해?’ 같은 처지면서 왜 이렇게 자유로워 보이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아주 진지하게 고백했다. ‘사실 나는… 페미니스트거든…’ 애틋한 우정의 순간에 이런 멘트가 나오다니. 하지만 사실이었다. ‘여성학에서 배우거든… 나이로 사람 후려치는 거 아니라고. 우리 100세 인생이라서 에너지 분배 잘 해야 해. 인생의 즐거운 이벤트는 20대에만 몰려있는 게 아니니까.’
마지막 장을 펼쳤다. 98번 ‘___해서 미안해’ 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눈 딱 감고 한번만 더 외면하기로 한다. 연말은 바쁘니까. 다음 질문. 99번이다. ‘올해 나의 가장 큰 도전은 ___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럴듯한 말도 떠올려 봤지만 나는 올해 큰 도전을 안 한 것 같다. 마지막 도전을 한다면 98번 질문에 진심으로 답하는 것. 그래서 다시는 같은 일로 상처 주지 않는 것일 것이다. 올해가 아직 조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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