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생존해 계실 때는 먼 기침 소리도 조심하던 후손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각자 큰소리를 낸다.’
정신분석학 발달사는 이처럼 한 가문에서 일어나는 일과 비슷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가 1939년 세상을 뜨기 얼마 전부터 정신분석학에는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너무 일찍 큰소리를 냈던 알프레트 아들러나 카를 구스타프 융 등은 축출되거나 스스로 떠났습니다.
새로운 목소리에는 멀리 영국 런던에 일찍 자리 잡았던 멜라니 클라인과 지지자들이 있었습니다. 클라인 학파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환상’이라는 개념으로, 환상의 근원은 몸이어서 뇌가 미숙한 신생아에게도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말이 아직 둔한 어린아이도 ‘자유연상’ 대신 ‘놀이’를 활용해 분석합니다.
클라인 학파는 프로이트 가족이 나치 독일의 압제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이후 정신분석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딸 아나 프로이트 지지자들과 2차 세계대전 중에도 모여 엄청난 논쟁을 했습니다. 이론은 발전했지만 적대감은 봉합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영국정신분석학회라는 ‘한 지붕’ 밑에서 살며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합의해 현재 ‘세 가족’, 프로이트 학파, 클라인 학파, 양쪽에 속하지 않는 독립 집단이 모여 경쟁하고 있습니다.
정통 클라인 학파의 해석은 즉각적이고 직설적입니다. 자유연상이 충분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아나 프로이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미국 정신분석학은 클라인 학파의 분석이 거칠다며 오랫동안 무시해 왔습니다. 이제 금기는 풀렸고 세월이 흐르면서 현대 클라인 학파의 분석과 프로이트 학파의 분석은 서로 조금씩 닮아가고 있습니다.
프로이트 사후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자기 심리학이 주도했지만 관계 학파, 상호주관성 이론 등이 등장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해리 스택 설리번 이론을 기반으로 미국식 정신분석의 기치를 내세운 관계 학파의 이론이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프로이트의 ‘본능적 욕구설’에 반해 ‘관계’가 마음을 움직인다고 봅니다. 분석받는 사람과 분석가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통해 현재 이루어지는 경험이 분석의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과거는 묻지 마세요’라는 의미입니다. 분석 과정의 전이도 관계의 측면에서 이해합니다. 과거의 진실에 대한 해석보다는 새로운 관계의 경험에 집중합니다.
전공의 시절에 선생님께서 제게 그러셨습니다. 약물 요법은 환자를 진료하면서 배워야 하지만 정신분석은 책을 보고 따라서 하면 된다고. 존경하는 선생님의 말씀을 감히 반박할 수는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전문의가 되어 이런저런 약들을 주도적으로 처방해 보고 정신분석가 인증을 거쳐 경험을 쌓아 보니 그 말씀이 타당하지 않았습니다. 약물학은 물론이고 정신분석의 실제도 결코 책을 읽고 이론만으로 따라 할 수 없는 매우 전문적인 영역입니다. 더욱이 정신분석 이론이 다양화되면서 분석가들의 머리는 더 복잡해졌습니다.
다양한 이론들이 새로운 관점인가 아니면 기존 이론의 새로운 포장인가에 대한 논평을 떠나 분석 현장에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행스러운 점은 어떤 이론도 모든 사람에게 표준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민등록번호처럼 모든 사람은 다 고유합니다. 우울한 사람도 성장 배경, 가족 구성, 성격, 살아온 사연이 모두 다릅니다. 어떤 하나의 틀에 맞출 수 없습니다. 이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대 정신분석의 실제 현장에서 다루어지는 내용과 과정은 학파 간에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일 때는 주로 임상 예를 토론합니다. 이론을 이야기하면 절대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영국 분석가 윌프레드 비온은 “분석 시간에 들어가기 전에 분석가는 분석받는 사람에 대한 지난 기억이나 그날 분석에서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 있다면 모두 비우고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현대 정신분석의 실제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프로이트 생전에는 분석가는 전문가여서 이미 다 알고 있고 분석받는 사람은 모르고 있으니 ‘알려준다’는 식이었습니다. 이제는 나도 너도 다 아직 모르니 협동작업을 통해 ‘알아내자’는 식입니다. 분석가의 역할이 ‘선생’에서 ‘동반자’로 바뀌었습니다.
이론의 다양성에 관해서는 무리한 통합보다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분석받는 사람의 고유성에 맞추어 가장 적합한 이론을 활용하면 된다는 입장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주문 식단이 아니고 뷔페식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요. 물론 아직도 다수의 분석가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이론을 고집하고 전수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특별합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방향이 보입니다. 정신분석은 이론보다는 실제 상황에 초점을 맞춘 ‘맞춤 양복’입니다. 키와 허리둘레 값만 가지고 사서 입는 ‘기성복’이 아닙니다.
오늘날 모든 학파가 프로이트의 정통 후계자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면서 프로이트가 놓친, 인간의 마음에 관한 소중한 것들을 자신들이 발견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론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목소리와 어긋난다면 실체가 없는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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