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기타 가수 김세환 씨(71)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곧잘 이런 말을 듣는다. 약속 장소에 하체에 딱 달라붙는 ‘쫄바지’를 입고 나타나기 일쑤니 그럴 수밖에 없다. ‘쎄시봉’의 막내 가수인 그에게 음악은 인생의 한 바퀴다. 나머지 한 바퀴는 바로 자전거다. 그는 요즘도 자전거 안장 위에서 시내 곳곳, 전국 곳곳을 누빈다.
가요계 데뷔 50주년을 맞은 올해 그는 정규 앨범 ‘올드 & 뉴(Old & New)’를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앨범 출시는 2000년 두 장의 리메이크 앨범 ‘리멤버(Remember)’ 이후 19년 만이다. 팝 트로트 곡 ‘사랑이 무엇이냐’를 비롯한 신곡 4곡과 통기타 세대를 사로잡았던 히트곡 4곡을 넣었다.
앨범 발표 후 그는 방송국이나 행사장에 가는 날이 많다. 주로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역시 자전거다. 그는 “자전거 헬멧을 쓰면 머리가 눌리기 때문에 TV 출연을 하는 날은 어쩔 수 없이 자동차를 탄다. 하지만 라디오 방송이나 개인적인 모임, 행사 때는 무조건 자전거에 몸을 싣는다”고 했다.
“건강에 좋죠, 차 막히는 거 걱정할 필요 없죠, 차가 안 막히니 시간도 절약되죠, 주차 걱정할 필요도 없죠….” 묻기도 전에 자전거 예찬이 이어졌다.
“그러면 일주일에 몇 번 정도 타시나요”라는 기자의 ‘우문(愚問)’에 “횟수는 잘 모르겠다. 자전거는 시간이 되면 언제나 타는 것”이라는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겨우내 라이딩에 굶주렸던 그는 본격적인 라이딩의 계절 봄을 맞아 더욱 열심히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 마니아로 유명한 그와의 동반 라이딩은 지난달 23일 이뤄졌다.
○ 안장 위에 나이는 없다
김 씨는 원래 라이딩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이날 오후 개인 일정으로 캄보디아로 출국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자전거 친구’인 구자열 대한자전거연맹 회장(66·LS그룹 회장)의 ‘번개’ 제안에 단숨에 약속 장소로 달려왔다. “아직 짐도 채 꾸리지 못했다. 도중에 돌아가더라도 탈 만큼 타고 가려 한다”고 말했다.
수십 년 자전거로 단련된 두 사람의 스피드를 따라잡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초보 라이더인 기자는 두 사람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는 것 자체가 벅찰 지경이었다. 두 사람이 앞장서 바람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진즉에 낙오했을 터였다.
이날 라이딩은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을 출발해 한강 남쪽 자전거도로∼팔당대교∼한강 북쪽 자전거도로를 통해 다시 올림픽공원으로 돌아오는 약 50km코스였다. 쉬지 않고 2시간 정도 페달을 밟아야 했다. 라이딩 막판 무렵 기자는 더 이상 페달을 밟지 못할 정도로 기진맥진했다. 봄을 시샘하는 진눈깨비까지 쏟아져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무척 짧은 라이딩”이라고 입을 모았다. 궂은 날씨 때문에 더 긴 코스를 달리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김 씨는 “한창 때인 40대 때는 서울에서 속초까지 250km 넘는 코스를 하루에 달린 적도 있다. 새벽 5시에 서울에서 출발해 속초에 도착하자 오후 6시였다. 꼬박 13시간이 걸렸다. 미시령 고개를 올라가는 데만 5시간 걸렸다”고 했다. 김 씨 일행은 그날 속초에서 하루를 자고 이튿날 다시 페달을 밟아 서울로 돌아왔단다.
헬멧을 벗은 그의 얼굴에선 나이가 가늠되지 않았다. 여전히 미소년 같은 미소가 남아있었고, 건강한 사람 특유의 활력이 넘쳤다. 기자의 눈치를 알아챘는지 김 씨는 “1948년생이니 한국 나이로 72세다. 그런데 긍정적인 마음으로 좋아하는 자전거를 즐기다 보니 나이도 먹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 인생이 아름다워지는 두 바퀴
김 씨는 한국에서 ‘산악자전거(MTB) 1세대’로 꼽힌다. MTB란 말이 생소하던 1980년대 중반 미국 유타주에 스키를 타러 갔다가 MTB와 인연을 맺게 됐다. 그는 “마침 그날 스키장이 운영을 하지 않았다. 근처에 자전거 가게가 있어 들렀더니 기어가 3단으로 된 자전거가 있더라. 직원에게 무슨 자전거냐고 물었더니 ‘산에서 타는 자전거’라고 하더라. 산을 내려오는 게 스키랑 비슷한 묘미가 있을 것 같아 바로 구매해 한국에 갖고 들어왔다”고 했다.
큰 자전거를 그대로 비행기에 싣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사를 하나씩 다 풀어 분리해서 트렁크에 나눠 실었다. 혹시 나중에 조립을 못 할까 싶어 일일이 그림을 그려 위치를 파악했다. 그는 “붓대 속에 목화씨를 숨겨온 문익점이 된 것 같았다”며 웃었다.
구 회장과의 인연도 두 사람의 공통된 취미인 스키장에서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됐다. 김 씨는 국내에서도 겨울이면 스키장을 자주 다녔다. 그런데 보통 사람처럼 자동차가 아닌 MTB를 타고 스키장엘 갔다. 이미 자전거에 관심이 많던 구 회장은 스키장에서 만난 김 씨가 타고 온 MTB의 매력에 흠뻑 빠져 버렸다. 이후 두 사람은 틈틈이 MTB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김 씨는 MTB 타기에 대해 “공기 좋은 산에서 자전거를 타다 보면 정말이지 산소가 씹히는 기분이 든다. 잠자리가 때리는 뺨도, 코스모스가 방긋방긋 웃는 모습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했다.
김 씨가 꼽은 ‘MTB 인생 자전거’길은 강원 양양 미천골이다. 그는 “20년 전만 해도 사람이 거의 없을 때다. 여러 친구와 함께 미천골을 타고 내려오다 너무 아름다운 광경에 모두 넋을 잃었다. 자전거에서 내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폭포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구 회장 역시 2002년 유럽 알프스산맥 650km 구간을 6박 7일간 달리는 ‘트랜스 알프스’를 완주할 정도로 ‘MTB 마니아’다. 구 회장은 “코스가 너무 위험해 아내(이현주 씨)가 알프스 대회 내내 냉수 떠 놓고 사고 나지 말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무사히 완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내가 자신의 이름을 ‘완주’라고 바꾸고 싶었다고 하더라”고 했다.
요즘 들어 두 사람은 도로 사이클을 더 많이 탄다. 김 씨는 “MTB가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라면 로드는 세단이라고 보면 된다. 도로 사이클은 MTB로는 느끼기 힘든 스피드가 매력”이라고 했다. 김 씨는 2007년 자신의 자전거 경험을 살려 ‘김세환의 행복한 자전거’라는 책도 펴냈다. 부제는 ‘인생이 아름다워지는 두 바퀴’다.
○ 남은 버킷리스트는?
김 씨는 기자와 같은 초보 라이더들에게 책에 나오는 내용 두 가지를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첫 번째는 “자전거를 가장 잘 타는 사람은 안 다치고 오래 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안전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싼 자전거를 타야 잘 타는 거라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다치고 아프면 타고 싶어도 못 타는 게 자전거”라고 했다.
두 번째는 “자전거에서 가장 중요한 부품은 바로 안장 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괜히 자전거를 타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할 필요가 없다. 고가의 자전거, 고가의 부품이 아니라 안장 위에 앉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자전거는 자신의 심장과 체력과 근력으로 타야 한다”고 했다.
김 씨와 구 회장에게 ‘초보 라이더에게 추천하고 싶은 코스’를 물었다. 따로따로 질문을 던졌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답이 나왔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북한강 자전거길(서울∼춘천)을 추천했다. 구 회장은 “이곳저곳 많이 다녀봤지만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북한강 자전거길만 한 곳이 없는 것 같다. 달리다 보면 산이 있고, 또 달리다 보면 물이 있다. 초보자분들께는 강촌이나 춘천까지 자전거를 기차에 싣고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를 추천 드린다. 실력이 좀 붙으면 왕복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김 씨 역시 “북한강을 따라 달리는 서울∼춘천 코스는 어디를 가도 작품이다. 외국 라이더들에게도 꼭 추천하고 싶은 코스”라고 했다.
우연처럼 필연처럼 두 사람의 ‘버킷리스트’도 똑같았다. 자전거로 평양까지 달려 보고 싶다는 거였다. 구 회장은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함께 타는 멤버들과 함께 평양까지 한번 가 보고 싶다”고 했다. 김 씨도 “아버지가 원래 개성 출신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개성은 너무 가깝지 않나. 이왕이면 평양까지 달려보고 싶다”고 했다.
안장 위 영원한 청춘인 두 사람은 언제까지 자전거를 타고 싶을까. 이미 준비된 대답이 김 씨의 입에서 나왔다. “제가 얼마 전에 자전거 보험을 들었어요. 85세 만기로 보험료를 냅니다. 그때까지만 돈을 내면 100세까지 보장이 된다고 하네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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