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맞나 싶게 찬 바람이 매섭게 불던 날이었기에 정관 스님(63)의 강연은 귀를 붙잡았다. 1일 서울 중구 충무로의 ‘샘표 우리맛공간’에서 열린 ‘우리맛 위크―봄나물 특강’에서였다. 정관 스님이 강의와 요리 수업을 함께 진행하는 이 행사는 강의를 듣고 싶어 하는 일반인의 경쟁이 치열해 ‘당첨되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라는 블로그 후기가 올라올 정도다.
정관 스님은 넷플릭스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시즌3’에 출연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의 출연분은 2017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컬리너리 시네마 부문에 초청됐고 에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15년 뉴욕타임스는 ‘정관 스님, 철학적 요리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음식을 만들고 있다”며 찬사를 보냈다. 그의 손에서 빚어지는 사찰음식은 ‘신(新)한류’로 불릴 만하다. 정관 스님이 주지로 있는 전남 장성군 백양사 천진암에는 주말마다 20, 30명의 외국인이 찾아와 사찰음식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이날 스님이 선보인 나물 요리는 빡빡장(강된장)을 올린 방풍나물죽과 두릅나물 무침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바구니엔 파릇한 나물이 가득했다. 풍을 예방한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방풍나물은 약재로도 많이 쓰이는 나물이고 독특한 향을 지닌 두릅은 없어졌던 입맛을 다시 돌게 한다는 나물이다.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면서 정관 스님은 “나물이라는 게 그야말로 우리나라 음식이더라”라면서 “익힐 것은 익히고 절일 것은 절이고 간장 된장으로 무칠 것은 무쳐야 한다. 그렇게 밸런스를 맞춰 음식을 해야 몸에 약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해진 레시피가 따로 없다는 스님이다. 이날 강의에서 그는 “한 가지 방법으로만 요리한다면 죽은 음식”이라면서 “생명체는 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변화한다. 매일 요리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강의가 끝난 뒤 만난 자리에서도 정관 스님은 “식재료를 온전하게 이해하고 그에 맞춰 요리해야 한다”고 거듭 밝혔다.
―레시피가 없으면 매번 맛이 달라지지 않나.
“레시피가 있으면 틀에 박힌 고정된 음식을 만들어낸다. 식재료는 그렇게 고정된 대상이 아니다. 식물은 땅을 의지해 뿌리박고 잎을 돋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한 생명이 나고 죽기까지 한 생애가 담겨 있는 것이다. 저마다 고유의 삶의 무게가 있다. 두릅은 두릅대로, 방풍나물은 방풍나물대로. 요리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젊은 연구자들이 ‘천재 스님’이라고 부른다는데…(정관 스님은 샘표식품이 진행해 온 ‘우리맛 연구 프로젝트’의 멘토로 참여하고 있다).
“하하. 요리를 할 때 ‘내 입맛에 맞으면 음식을 먹는 사람들에게 80% 이상 맞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과 요리를 공유하지 않겠나.”
지난겨울 천진암을 찾은 우리맛연구 팀원들에게 스님이 소개한 제철 식재료는 ‘겨울무’였다. 무는 사철 중 겨울무가 제일 맛나단다. 스님은 그 겨울무의 윗부분, 중간, 아래가 저마다 맛이 다르고, 무를 직각으로 자를 때와 비스듬히 자를 때 각기 맛이 다르다면서 맞춤 요리법을 전했다. 이날 함께 참석한 최정윤 샘표 우리맛연구 팀장이 설명을 더했다. “스님은 조리법을 외워서 하시는 게 아니라 식재료 본연의 맛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요리하시기 때문에 젊은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주재료와 어울리는 부재료에 대한 새로운 시도가 파격적이면서도 놀랄 만큼 잘 어울려 다들 ‘천재 스님’이라고 부른다.”
타고난 감각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시골 농부의 딸이었던 스님은 예닐곱 살 때부터 부엌에 들어가 찬장을 뒤져 재료를 꺼내서는 혼자 요리를 하면서 놀았다고 했다. 열일곱 살에 출가한 뒤에도 내내 자연의 먹을거리를 찾고 음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좋았다고 했다. 이렇게 쌓인 시간을 통해, 익숙한 재료에서 생각지도 못한 맛을 찾아내는 스님의 미각이 다듬어졌다.
―오늘 강의 중에 ‘방풍나물을 갈면 생선 냄새가 난다’고 했다.
“식물의 맛과 향은 다 다르다. 재료에 따라 음식 맛이 달라지고. 냉이를 볶으면 해물 맛이 난다. 달래에 된장을 넣어 볶으면 견과류 맛이 나더라. 가죽나물을 볶으면 양고기 맛이 나고. 어성초를 소금으로 발효시키면 젓갈 대용으로 쓸 수 있다.”
―음식의 역할은 무엇인가.
“땅에 의지하는 모든 생명은 에너지가 없으면 도태된다. 에너지는 몸을 움직이는 것뿐 아니라 정신의 동력이기도 하다. 에너지가 지나치게 많을 필요는 없다. 사찰음식은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를 전달한다. 사찰음식엔 정신과 육체를 연결해주는 에너지가 담겨 있고,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험이 들어 있다.”
―사찰음식을 접하는 일반인은 어떤 영향을 받을 수 있나.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 대한 난제가 있지 않나. 나 자신이 누구인지 계속해서 자문하게 되는 것 말이다. 나 자신을 알아가기 위해 비우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채우는 것도 필요하다. 음식을 먹는 일, 그로 인해 기운을 갖는 일은 자신을 알기 위한 도구 중 하나다.”
―먹는 일이 어떻게 자신을 아는 도구가 될 수 있는가.
“식재료에 대해 생각해 보라. 먹고 나면 그만인 게 아니다. 식재료는 죽음으로써 그것을 먹는 대상을 살린다. 음식에는 그 과정이 들어 있다. 더욱이 사찰음식은 마음을 일깨워주는 도구다. 마음이 열리기 위해선 많은 영양가, 많은 양념이 필요한 게 아니다. 단순한 먹을거리로 채워야 한다.”
뉴욕타임스 기자 제프 고디너는 “마늘도 고기도 쓰지 않는 사찰음식의 맛의 비밀은 시간”이라고 했다. 그는 간장 된장 김치 같은 발효식품을 예로 들었다. 오랜 시간이 담긴 한국의 음식에 세계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세계가 사찰음식에 열광하는 이유를 묻자 정관 스님도 “오래 갈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시간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 맛이라는 건 뭔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에게 숙지된 맛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우리 맛’이라는 걸 모른다. 인스턴트가 가미되지 않은 본연의 맛, 그 우리 맛을 찾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식재료를 완전히 파악해야 하고.”
―앞으로의 계획은….
“우리 사찰음식의 조리법은 다채롭다. 삶고, 무치고, 전을 부치고, 발효시킨다. 미얀마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각국의 사찰을 찾아가 현지 식재료를 우리의 조리법으로 만들고 그 방법을 알리고 싶다. 그게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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