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한채 홀랑 태워 먹었어요. 그나마 우리는 집 한 채니까 다행이지 창고까지 탄 주민들은 피해가 더 커요.”
“회사 창고에 불이 붙었어요. 20년간 일한 직장인데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죠.”
“어젯밤 같은 바람은 처음이에요. 차가 앞으로 못 가고 뒤로 밀릴 정도였으니까요. 안 믿기시죠? 집에 불이 붙었는데. 살기 위해 도망쳤어요.”
“보일러실에 불이 붙어 소방차에 이것만 좀 꺼 달랬더니 매뉴얼대로 한다면서. 집은 불에 타고 아내와 둘이 옷만 입고 나왔어요.”
“솔직히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요. 소방차가 물이 없는지 우리집 쪽은 보지도 않고 갔어요. (집이 타는 것)그냥 바라 보기만 했어요. 그 기분 압니까?”
이는 지난 4일 밤 발생한 강원 고성· 속초 산불 화마에 집이 타거나 무너져 버린 이재민들이 사고 당일 호소한 딱한 심정들이다.
피해지역인 고성과 속초에 만난 이들은 한결같이 집은 불에 타고 있는데 손쓸 수 없이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안타까워 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이번 강원 고성 속초 산불은 지난 4일 오후 7시 17분께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한 주유소 맞은편 전신주에서 시작돼 인근 야산으로 번져 강릉시 250ha, 고성군 250ha, 인제군 25ha 등 총 525ha 소실 피해를 냈다.
사망자는 1명이 발생했으며 주택 285채(6일 오후 9시 기준), 건물 17개동, 창고 57채, 비닐하우스 9동, 캠핑리조트 46동, 농기계 241대가 소실되는 등의 피해가 발생했다.
대피 이재민은 653명으로 이들은 정부가 제공한 임시주거시설 20개 대피소에 나누어 머무르고 있다.
◇화재 현장서 만난 중년부부 산불과의 사투
보통의 강원도 산불은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 규모가 단계적으로 특정되는데 비해 4일 발생한 고성 속초 산불은 초기 정보가 없이 산발적으로 여기저기 산불이 추가로 발생했다는 소식만 간간히 들려왔다.
고성· 속초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화재가 발생, 번지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도로 통제가 이어지고 양양고속도로로 우회해 속초로 진입해야 했다. 도착할 무렵 속초 방향의 야산에서는 이미 시뻘건 불기둥이 여기저기서 치솟고 있었다.
속초IC를 지나 불길을 쫒아 도착한 야산에서는 이미 메케한 냄새와 연기가 가득해 마을을 뒤덮었고, 인근 국도 전체로까지 번진 상태였다.
주민들은 산불이 발생한 반대 방향으로 대피하고 있었다. 이때 한 중년 부부는 위험해 보이는 불 붙은 창고 진화작업을 하고 있었다.
기자는 무리한 진화에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부부는 물을 퍼 나르기에 바빴다. 이들은 물을 뜨기 위해 잠시 숨을 돌리며 ‘소방차가 오지 않아 직접 불을 끈다’고 했다.
이날 강풍은 순간 최대 초속 30m. 평소 강원도에서도 볼 수 없는 역대급 강풍이었다. 그렇게 강풍을 업은 화마는 마을 야산과 주택, 창고들을 휘감았고 화마에 못 이긴 야산의 나무들은 힘 없이 타들어 갔다.
◇화마로 위협받은 ‘LPG 충전소’· 콘도, 자체 진화 나섰지만 속수무책
서둘러 옮겨 간 두 번째 화재 현장 장소는 논란이 많았던 속초 장사동 장천마을이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이 다된 오후 11시를 넘어서고 있었고 산불 발생도 약 4시간이 경과된 상태로 충전소 앞은 이미 취재진과 소방대원들이 뒤섞여 화재 진압 과정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곳 LPG 충전소 인근은 아비규환이었다. 자칫 충전소가 터지는 사고라도 발생하면 대형 인명사고는 물론 인근까지 더 큰 피해가 예상됐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산불발생 4시간 23분 경과한 오후 11시 40분. 메케한 유독가스가 도로 전체를 뒤덮어 잠시 연기를 피해 자리를 옮겨 맑은 공기를 마셨지만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차 안의 에어컨도 틀어보고 코 속의 연기 냄새를 빼내려고 해봤지만 이미 화재현장을 뛰어다니며 코 속에 가득 들어찬 연기는 답답하고 따갑기만 했다.
급기야 세 번째 상황을 알리는 메시지가 왔다. ‘H 콘도에 산불 불씨가 옮겨 붙었다는 제보가 있어 이를 확인 요망’이라는 내용이다.
맑은 공기도 잠시, 바로 인근에 위치한 H 콘도로 향했다. 시간은 자정을 넘겨 5일 오전 1시를 향하고 있었다. 산불 발생 5시간 45분이 경과한 뒤였다. 진화 소식은 없었고 불은 점점 강풍에 더해져 번져가고 있었다.
콘도에 들어서자 골프장이 있다는 숲 중앙에서 연기가 났다. 콘도 관계자가 입구를 차량으로 막아놓아 콘도 안쪽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이내 다시 안내를 받아 연기가 발생한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장에는 소방차도 진화인력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콘도 내부 직원 약 20여 명이 자체적으로 조달한 소방 호스를 끌고 니와 발화지점까지 이동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속초의료원 환자 대피 소동 및 살수차 동원
추가 제보가 들어왔다. 속초의료원에도 불이 옮겨 붙었다는 내용이다. 속초의료원에 도착해보니 병원 측은 인근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중환자 36명을 비롯해 입원환자 전원을 주위 일반병원과 요양원 등으로 이송 완료를 시킨 상태였다. 병원의 발빠른 대처가 돋보였다.
상황은 5일 오전 2시로 산불 발생 6시간43분이 경과된 후였다.
속초 영랑호 인근 화재현장이 심각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영랑호를 따라 이어진 도로에 자리한 컨테이너로 창고와 야적장은 마치 뜨거운 용광로처럼 붉게 달아올라 섬뜩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 업체는 시청 등 관공서의 행사 제작물을 받아 제작하는 업체라는 이야기를 주민을 통해 들었다. 그러나 업체 사람들은 아직 창고에 불 붙은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며 연락도 안된다며 안타까워 했다.
바로 옆에 눈에 띄는 차량이 한 대 서 있었다. 사설 살수차였다. 불 붙은 주택 1층을 진화하는데 용이했고 의뢰한 주민은 다시 불씨가 살아나면 2층까지 태우면 안된다며 살수차가 더 기다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미 물통이 빈 살수차는 물을 채우려 떠나고 주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살수차를 기다려야만 했다.
◇영랑호 인근 창고 수 억원 상당의 건설자재 화마가 삼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도 소방차와 소방인력이 보였다. 영랑호 인근으로 도기 등 건설자재를 보관하는 야적장으로 확인됐다. 이미 야적된 자재는 거의 다 타버렸고, 뒤늦게 현장을 찾은 업체 사장은 불에 타고 있는 창고를 바라보며 주저앉아 있었다.
업체 사장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뜸 같이 온 지인과 취재진에게까지 버럭 화를 내며 “이게 뭡니까?…내일 물건 나가야 되는데”라며 황당해 했다.
이들은 기자들을 시청에서 나온 직원으로 착각하고 하소연을 했었다고 했다. 취재중임을 알렸다. 그는 그 뒤에도 불 타는 창고 옆에서 한참을 푸념 섞인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오죽 답답하면 그렇겠나 하는 생각에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모자를 벗었다 썼다를 반복하던 사장은 불에 타고 있는 창고와 야적장 사진을 몇 장 휴대폰에 담고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영랑호 인근은 특히 피해가 컸다. 특히 사람이 상주하지 않는 창고나 주택 그리고 작은 마을도 있어 불이 붙은 이후에도 한참을 방치하게 돼 피해가 더 컸던 것으로 보였다. 평소 물이 가득한 영랑호를 끼고 있는 곳에서 이렇게 속절없이 산불이 날아와 화재가 발생하고 집과 창고가 사라질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 했을 것 같다.
◇화재현장은 전쟁터, 대통령의 ‘특별재난지역’ 선포
기사 송고를 위해 들어간 속초소방서 주차장. 오전 6시로 산불 발생 11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밤샘 진화에 지친 소방관들도 소방차에 물을 채우는 짧은 시간을 금쪽 같은 휴식시간으로 활용했다.
날이 서서히 밝았다. 예정됐던 군, 소방, 산림 등에서 지원 나온 헬기 80여대가 상공에서 지원을 시작했다. 이들은 영랑호의 물을 연신 퍼나르며 속초의 구석구석 연기 나는 야산을 향해 물 폭탄을 터뜨렸다.
밤사이 감춰졌던 전쟁터 같은 산불 현장이 확인됐다. 속초와 고성 시내 곳곳은 테러영화나 전쟁영화에서나 볼 듯한 모습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집과 창고를 잃고 이재민이 된 시민들은 대피소로 향했다.
산불 발생 48시간 경과했다. 이제 강원도 산불의 완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물론 완전한 완진은 없다. 이미 밤새 탄 산 속은 숯더미를 품고 있는 시한폭탄이다. 주불을 잡고도 안심할 수 없는 강원도 산불의 현장, 역대 어느 화재 현장보다도 끔찍하고 속수무책으로 이틀 밤을 지켜봐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5일 화재 현장을 다녀가고 돌아간 6일 즉시 고성군·속초시·강릉시·동해시·인제군 등 5개 시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이로써 피해지역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면서 주민들의 생계안정 비용 및 복구에 필요한 행정·재정·금융·의료비용을 예산으로 그나마 지원이 가능하게 됐다. 다행이다.
‘30m 초강력 강풍’과 ‘화마’가 쓸고 간 악몽의 48시간. 이 끔찍한 시간이 다시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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