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레이첨단소재는 일본 회사다. 처음엔 새한그룹과 도레이의 합작회사였지만 새한이 어려워지면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이젠 도레이가 지분 100%를 갖게 됐다. 필름 부직포 원사 같은 기초소재부터 탄소섬유 신재생에너지 등 친환경 소재까지 만드는 기업으로 경북 구미시, 전북 군산시 등에 공장이 있다.
이 회사 임원들과 팀장, 직책과장, 각 부서의 안전 담당 직원들은 종종 ‘아까징재해’가 발생했다는 메일을 받는다. 40대 이상 세대의 어린 시절 만병통치약으로 불렸던 일본 소독약 ‘아까징끼’를 바를 정도의 경미한 재해가 어느 사업장에서 발생했다는 뜻이다. 이 경보가 뜨면 자신이 맡고 있는 부서를 둘러보고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한 번 더 체크해야 한다.
이 회사 공장 내부 횡단보도에 선 모든 사람들은 초록불이 들어와도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그리고 앞으로 한 번 손을 올린 뒤 건너기 시작한다. 약 66만 m²(약 20만 평) 크기의 대형 공장이라 하루 종일 작업차량, 승용차 등이 오가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양옆을 살피라는 취지다. 처음엔 어색해했던 직원들도 시일이 지나면 이 절차를 당연시한다. 구미 공장에 파견근무를 했던 한 직원은 “서울에 와서도 횡단보도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한동안 고생했다. 요새는 손을 올리는 대신 눈으로라도 체크한다”고 했다.
작업복을 입은 근로자, 정장 차림의 사무직, 방문객까지 횡단보도에 선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손을 올리는 장면을 상상하면 얼핏 웃음도 난다. 이들이 말 잘 듣는 유치원생처럼 회사의 규칙을 따르는 건 안 지킬 경우 법으로 처벌받아서는 아닐 것이다. ‘안전’이 가장 상위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새벽에 작업하다 숨진 김용균 씨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에도 산업안전 강화에 관한 논의가 지속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돼 올해 초부터 시행되면서 원청 기업의 책임이 강화됐고 사고가 생겼을 때 처벌 수위도 높아졌다. 하지만 법이 바뀌고 처벌 수위가 높아져도 어쩐 일인지 사고는 지금도 종종 일어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충남 서천군 한솔제지 장항공장에서 20대 근로자가 컨베이어 턴테이블 설비에 끼여 숨졌다. 이 사고 전에도 인천에서, 대전에서, 경북 문경시에서, 충남 예산군에서 기계설비 때문에 아까운 목숨들이 희생되는 사고가 계속됐다.
대부분 사고 원인 조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여전히’ 위험한 정비근로를 혼자서 하다가 사고가 생긴 곳도 있고, 여러 명이 근무했지만 사고가 생긴 곳도 있다. 어느 한 작업장에선 안전펜스까지 쳐져 있었지만 작업을 서두르려 했던 것인지 움직이는 설비 위를 건너려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법이 바뀌어도 사고가 지속되는 건 법만 바꾼다고 시스템이 저절로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이런 것이다. 우선 크고 굵게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이 전 조직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작고 세밀한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한 부서, 개인의 재해 상황을 전 회사가 공유해야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는 원칙에 따라 작은 재해도 공유하는 게 시스템이다. 시속 20km라는 속도 규정이 있어도 갑자기 툭 튀어 나온 차량을 조심해야 차량 재해를 차단할 수 있다는 원칙 아래 반드시 도로의 위험 상황을 확인시키는 게 시스템이다. 그리고 아무리 귀찮고 때로 어색하더라도 이를 지키는 게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집단경험과 공감대를 만들어 가는 게 시스템이다. 법이 강화됐으니 우리도 각자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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