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놉시스=황혼에도 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까칠한 노배우 ‘신구’. 기삿거리를 찾지 못해 상사에게 늘 욕을 먹는 말년 말단 기자인 ‘나’. 해고 위기에 몰린 ‘나’는 기자 인생을 역전시킬 거물급 인터뷰를 하기 위해 노배우에게 접근하는데…. 세대를 초월한 교감과 위로, 까칠한 노배우가 젊은이들에게 애정을 담아 건네는 속 깊은 이야기. 출연=신구(83), 나 / 공연일=2019년 4월 8일 / 관람료=800원》
S#1 (F·I) 연극이 시작되기 전 무대 위. ‘신구’와 ‘나’가 소품으로 쓰이는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구=내 기사를 쓰겠다고? 할 얘기도 없는데…, 기자들 물어보는 게 다 비슷하더라고.
나=(당황해 우물쭈물하며) 저…, 그래도…. 몇…가지 좀….
신구=알고 싶은 게 뭔데?
나=‘신구’가 예명인지는 몰랐습니다.
신구=원래 이름은 신순기인데, 1962년 남산 드라마센터 부설 연극아카데미 1기생으로 들어갔을때 만들었어. 첫 작품을 앞두고 이름이 좀 촌스러운 것 같아서 극작가 동랑 유치진 선생께 예명을 부탁했더니 한 달 정도 후에 ‘이거 써봐’ 하시더라고. 그게 ‘久(오랠 구)’였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몰라. 안 가르쳐주시더라고. 어려워서 묻지도 못했고.
나=처음에는 아나운서를 지망하셨다고요.
신구=제대 후에 뭘 할까 고민하다 아나운서에 끌려서 당시 명동에 있던 시청각교육원을 다녔어. 그때 우연찮게 연극아카데미 모집 광고를 봤는데 기왕이면 배우가 더 나를 ‘맛있게’ 보여줄 수 있겠다 싶어서. 벌써 57년 전이구먼. 전무송 반효정 이호재 등이 우리 동기지.
나=수재들만 간다는 경기중고교를 나오셨더군요.
신구=그랬대. 하하하. 선생님 잘 만난 인연으로…. (선생님요?)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서울대 법대를 다니면서 교사를 하셨는데, 그 양반 눈에 내가 가난하지만 공부를 시키면 잘 할 것 같아 보였나 봐. 우리 반 세 놈을 골라 경기중학교 시험을 보게 했는데 두 명이 됐지. 내가 외우는 건 참 잘했어. 수학도 원리를 이해하지 않고 외워 풀었으니까. 수학을 아주 싫어했거든. (외워서 풀었다고요?) 그러니까 (서울대) 떨어졌지. 두 번 떨어졌어. 허허허.
※그는 경기고 52회로 고건 전 국무총리,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이 동기다. 서울대 상대에 떨어진 뒤 성균관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중퇴했다고 한다.
나=주변에서 연극하는 걸 반대했을 것 같은데요.
신구=많이 반대했지. 하지만 내가 하고 싶었으니까…. 만약 연극을 안 했다면 아마 봉산탈춤 인간문화재가 됐을 거야. (봉산탈춤요?) 젊을 때 봉산탈춤을 배웠거든. 1968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1년간 탈춤도 소개하고 현대무용도 배우고 공연을 했지. (공연을 할 정도로 영어를 잘하셨나 봅니다) 음…, 단역인데 대사는 없는….
※그는 봉산탈춤 예능보유자인 김진옥에게 전수받았다. 2013년 예능프로 ‘꽃보다 할배’에서 파리 개선문 위에서 이 춤을 춰 화제가 됐다.
나=허스키한 목소리가 특징인데 원래 목소리입니까.
신구=이게 연습해서 만들어진 건데…, 미성은 아니지만 관객이 듣기 좋게 갈고 닦고 연습해 만들어진 결과지. 한참 연기 배울 때 지금은 돌아가신 바리톤 이인영 선생님께 발성법을 배웠는데, 지금도 목이 잠기면 방문을 닫고 낼 수 있는 한계까지 소리를 내는 연습을 하고 있지. 나는 재주는 대부분의 사람이 거의 같다고 봐. 단지 누가 더 노력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재주만 믿고 노력하지 않아서 망한 사람 많이 봤다고. (F·O)
S#2 (F·I) 젊을 적 이야기가 나오자 조금씩 흥이 나기 시작한 노배우. 이제는 스스럼없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신구=지금 ‘앙리 할아버지와 나’란 연극을 하고 있는데…, 이 연극이 참 재밌어. 앙리는 까칠하고 괴팍하고 고집불통이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노인인데… 내게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고. (젊을 때부터 아버지나 할아버지 역을 많이 하셨다고요) 주연을 맡을 조건이 아니니까. 나는 배역을 받는 쪽이지 선택하는 쪽도 아니고. (1969년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주연으로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을 수상했는데요) 그건…, 얼굴이 상관없는 배역이라…. 인상이 강해서 젊을 때는 간첩, 파계승, 인민위원장, 악당 같은 까맣고 빨간 역할이 죄다 내 차지였어. 햄릿이나 멜로 작품은 안 오고. (죄송한데 얼굴 때문에?) 죄송하긴 사실인데…. 불륜역도 얼굴이 돼야 하지.
나=50년이 넘게 연기를 해왔는데 아직도 아쉬운 점이 있습니까.
신구=날카롭게 조목조목 지적하는 비평이나 리뷰에 대한 갈증이 있어.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콕 집어서 이렇게 해달라는 말을 잘 안 합디다. (잘해서 아닌가요) 경험은 좀 있겠지만, 완벽할 수는 없는데…. 그런 지적이 있으면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을 텐데, 공연은 공동작업이니까 나이나 경험에 구애받지 않고 할 말은 하면서 작업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어떤 점이 부족하다고 느끼십니까) 항상 부족하지. 작품 속 모든 인물과 상황을 경험해본 게 아니니까. 재공연도 마찬가지고. 먼저 한 것과 똑같이 하면 의미가 없지 않겠소? 새로운 해석을 넣고, 더 살찌워서 풍부한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해야지. (그래서 파마를 하신 건가요) 어떻게 하면 괴팍한 프랑스 할아버지 느낌을 줄 수 있을까 해서…. 난 원래 파마를 해본 적이 없어. 작년이랑 올해 이 작품 때문에 했지. 하하하.
나=‘니들이 게 맛을 알아?’란 햄버거 광고 대사는 지금도 패러디되는 유행어인데 원래 유머 감각이 있으신가요.
신구=하하하. 광고는 히트 쳤는데 정작 햄버거는 망했다고 하더라고. 그 광고도 그렇고, 시트콤(‘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도 평소 나와는 좀 다른 연기였는데… 그 또한 내 안에 내재된 모습이 아닌가 싶어. 연기에는 그 사람의 인격이 녹아들 수밖에 없지. 특별히 과장된 역할이 아닌 한, 대부분 자신의 본래 모습을 바탕으로 캐릭터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TV에서 보여지는 모습도 내 인격이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연기를 통해 보여진다고 믿고 있어. (F·O)
※‘니들이 게 맛을 알아?’는 2002년 공전의 히트를 친 롯데리아 크랩버거 CF 카피다. 광고가 워낙 유명해져 출시 한 달 만에 550만 개나 팔릴 정도로 인기였으나 기존 생선버거와 큰 차이가 없는 데다 가격도 비싸 오래가지 못하고 단종됐다.
S#3 (F·I) 지그시 눈을 감는 노배우. 아름다웠던 과거를 회상하는지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나=무척 바쁘실 텐데도 매니저가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신구=(눈을 뜨며) 응? 지금껏 한 번도 없었는데…. 젊었을 때부터 촬영 있으면 직접 의상 들고, 택시 타고 갔으니까. 지금은 이 분야가 다양해지면서 소속사도, 매니저도 생겼지만 난 처음부터 그렇게 훈련돼서 그런지 굳이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 그렇게 바쁜 것도 아니고…. (프로그램이 많을 것 같은데요) 없어. (네?) 하하하. 없어. 이거(‘앙리 할아버지와 나’)하고, ‘장수상회’(연극) 지방 공연을 다니고 있고, 얼마 전에 영화 ‘천문’을 찍었고, 드라마는 없고…. 광고도 광고주가 자주 틀어서 많아 보일 뿐이지 많이 찍은 건 아니야. 누구는 그 정도면 바쁜 거 아니냐고 하는데 몸에 배서 그런지 난 별로….
나=실례지만 연세에도 불구하고 인스타그램을 하시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그런데 팔로어는 19만6000명이나 되는데 팔로는 왜 한 명도 없습니까.
신구=하하하, 작년에 영화를 하나 찍었는데 회사에서 홍보해야 한다고 인스타 뭐라는 걸 만들어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게 뭐냐고 물으니까… 개인 사진 뭐 뭐라고…. 난 그게 뭔지도 몰랐어. 회사에서 만든 거지. 그러니까 팔로가 하나도 없는 거고. 하하하.
나=젊은이들에 대한 애정이 담긴 ‘신구어록’이 인터넷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신구=젊은이들이 실패할 걱정 때문에 도전도 못 하지는 않았으면 해. 이번 연극에서 떨어질까 봐 음악학교 지원을 주저하는 콘스탄스에게 앙리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어. ‘난 자네가 서커스단 코끼리 같아 보여. 그 큰 덩치로 어릴 때부터 말뚝에 묶여 꼼짝달싹 못하는 코끼리. 이제는 지 힘으로 뽑아버릴 수도 있는데 못 해. 왜 그런 것 같아? 그건 말이야,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이미 포기한 코끼리 자신의 생각 때문이야’라고. 어려워도 말뚝을 뽑는 젊은이들을 보면 부럽고 자랑스럽지. 잔소리지만… 삶이란 건, 성공이나 실패로 가를 수 있는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얼마나 매사에 열심히 사랑했느냐, 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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