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몫까지 잘 살아줘” 우리 삶을 응원하는 사랑의 응원단장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9일 15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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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충격과 상처를 극복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본작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희곡 ‘아버지와 살면’은 그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다. 딸과 아버지가 이야기에 등장하는데 딸은 23세, 아버지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죽었다. 그런데 3년 전에 죽은 아버지가 딸 앞에 나타난다. 딸의 죄의식과 한숨이 죽은 아버지를 불러낸 거다. 작가의 말대로 아버지는 딸의 마음 속 환영인 셈이다.

아버지는 딸이 트라우마로 인해 번개만 쳐도 원자폭탄을 연상하며 벌벌 떨고,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도 죄의식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사는 게 너무 안쓰럽다. 그래서 응원하러 온 거다. 그의 말처럼 사랑의 응원단장을 자처하며.

아버지는 딸에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라고 조언하지만 딸은 도리질을 한다. 아버지를 죽게 놔두고 도망친 것이 미안한 거다. 실제로는 도망친 게 아니었다. 딸은 원자폭탄에 피폭돼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리려고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딸까지 죽게 생기자 아버지가 설득해 떠나게 했다. 그럼에도 딸은 자기만 살려고 도망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애를 못 한다. 염치없이 자기만 행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아버지는 그런 딸에게 마지막에 헤어지면서 자기 몫까지 살아달라고 부탁했던 일을 상기시킨다. 자기에게 미안해할 게 있다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오랜만에 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고 아버지한테 고맙다고 말하면서 스토리가 끝나는 것으로 보아 딸은 아버지의 말을 따를 것 같다. 그렇다고 죄의식이나 내적 갈등이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딸은 아버지의 몫까지 살아가면서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갈 것이다. 스토리 속의 아버지가 딸에게 그러하듯, 비극적인 사건들로 인해 생이별을 하고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몫까지 살아달라면서 우리의 삶을 응원하는 응원단장들일지 모른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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