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 카페. 청년 8명이 모여 있었다. 사회자가 질문을 던지자 모두 고민에 빠졌다. 한 청년이 “지금 일은 적성에 맞지 않으니 ‘맞는 일을 찾아라’라고 조언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청년은 “고교 때 왕따 친구를 못 도와줬다”고 했다.
‘어른이 놀이터’라는 이 모임은 취업을 준비하는 여타 스터디그룹과는 달리 청년들이 스스로 돌아보는, 즉 ‘나를 스터디’하려는 목적으로 생겼다. 모임의 장인 이민해 씨(27·여)는 “인원을 8명으로 제한하는데, 늘 대기자가 많다”고 전했다.
● ‘내가 누군지’ 공부하는 청년들
서울 뿐 아니라 대구와 대전 등에도 이런 모임이 많아지는 추세다. 요즘 청년들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와는 ‘성공’과 ‘행복’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르다. 아버지 세대는 세상을 먼저 파악하고, 자신을 세상에 맞춰왔다. 하지만 요즘 청년들은 세상보다 스스로를 먼저 알고 싶어한다. 그래야 나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별도의 ‘자아탐색기간’을 가지는 청년들도 적지 않다. 김보준 씨(29)가 “간호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했던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하지만 김 씨는 2015년 서울아산병원에서 입사했다. 그러나 지난해 4월 김 씨는 병원을 그만뒀다.
막상 시작한 간호사 일이 자신에게 맞는지를 고민하던 과정에서 세계일주에 나섰고, 소아암 환자를 돕는 사하라 사막 횡단 마라톤에 참가한 경험을 토대로 ‘사막을 달리는 간호사’ 책도 출간했다. 세계일주 후 그는 구직활동을 중단한 채 적합한 직업과 꿈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기 위한 ‘6개월’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1~4일 동아일보가 취업정보업체 ‘캐치’에 의뢰해 청년 452명을 설문한 결과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154명·34.1%)보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다’(162명·35.8%)는 응답이 더 많았다.
● 갈등 피하기 힘들다면 ‘자아탐색’ 시간 줘야
‘자신부터 알아야 성공한다’는 청년들의 사고에는 직업안정성, 조기퇴직 등 사회가 구조적으로 달라진 점이 영향을 미쳤다. 영업직, 요식업 등 직업을 6번 바꾼 장재원 씨(34)는 “기성세대가 정년이 있는 직장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면 우리 세대는 수입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증가로 평생직장을 잡기가 어렵다면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일부터 찾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야 자신 만의 능력을 키워 회사에서 밀려나도 대처가 가능하고, 자유롭게 회사를 옮겨 다닐 수 있다. 2018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청년이 첫 직장을 떠난 이유는 “계약직이어서”라는 취지의 응답이 12.1%로 가장 많았다. 장경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청년은 이데올로기 등 거시적 틀이 아닌 개인의 행복추구와 합리성이라는 틀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기성세대와의 갈등이다. 5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KT 홍보행사에서 만난 유튜버 ‘감스트’ 김인직 씨(29). 유튜브 축구해설로 인기를 얻는 그의 사인을 받으려 수십명이 줄을 서 있었다.
김 씨는 2012년 인터넷방송 시작 후 공무원인 아버지와 6년 동안 사실상 ‘의절’했다. “정신 차리고 이상한 방송을 그만해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아버지의 눈에는 장난 같은 그의 방송이 제대로 된 ‘직업’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김 씨는 꾸준히 축구해설 영상을 제작했다. 지난해부터는 지상파TV에 출연했다. 김 씨는 “나에게 맞는 일을 찾고 싶었다”며 “아버지가 일찍 이해해줬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에게 기성세대 식 성공법칙을 강요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찾는 시간을 장려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선진국에선 청년기 자아탐색을 뜻하는 ‘갭이어(Gap Year)’가 보편화되는 추세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딸 말리아 오바마(21)도 2016년 하버드대 입학 전 1년 동안 갭이어를 통해 평소 경험하지 못한 스페인어 문화권을 여행했다. 미국 일부 대학에선 장학금을 지원하는 형태로 갭이어를 장려한다.
#아버지들의 변을 들어보니
‘나부터 알아야 성공한다’는 가치관을 가진 청년의 아버지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취재팀은 ‘세상에 자신을 맞춰’ 살아온 아버지들을 만나 자녀 소통에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를 들어봤다.
‘청년들의 신(新)성공법칙’ 기획보도에 등장한 청년의 아버지들은 “부모들도 요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자녀 세대의 달라진 생각을 기본적으로 인정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요즘 청년들은 경제적 수혜를 누렸던 자신들, 즉 아버지 세대와 달리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촉발된 저성장 시대를 살고 있다는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6개월간 ‘자아탐색기’를 갖고 있는 김보준 씨(29)의 아버지 영규(64) 씨는 현대자동차에서 40년간 근로자로 쉬지 않고 일했지만 아들의 삶을 응원하고 있다. “주변 친구들의 자녀는 취업도 하지 못해 아들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라며 “젊어서 선택권을 가지고 있을 때 스스로의 삶을 찾아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자녀들이 ‘나를 찾는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지나치게 함몰되지 말고 조금 더 세상을 넓게 보면서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면 좋겠다고 아버지들은 말했다. 직업을 수차례 바꾼 장재원 씨(34)의 아버지 경호 씨(70)는 “아들이 꿈을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며 “아들이 보험영업 일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고객들은 어떡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임감과 이타적인 마음도 아들 세대가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청년들도 아버지 세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들의 관점에서 한번 쯤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세대 간 이해가 높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세대 간 소통이 활발해지면 청년들이 꿈을 마음껏 펼치기 좋은 사회 환경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창간기획 ‘청년들의 신(新)성공법칙’ 특별취재팀은 기성세대와 달라진 새로운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대나무숲 e메일’(youngdream@donga.com)을 개설했다. 자신의 다짐을 비롯해 부모나 직장 상사, 정책담당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요구사항, 도움이 필요한 내용 등을 자유롭게 밝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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