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물질 배합 바꿀 때마다 신고… 이래서 기술개발 하겠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12일 03시 00분


[日 경제보복 파장]화평-화관-산안법 ‘족쇄’ 찬 기업들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 개정안이 올해부터 시행되면서 사전신고 기간(1∼6월)에 신고한 화학물질을 제외한 화학 물질은 이달부터 곧바로 안전성 평가를 등록해야 한다. 여기다 내년에는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등도 시행돼 기업들은 고용노동부에 화학 물질의 상세 내용을 담은 물질안전보건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연구개발(R&D)용 화학물질을 공개하지 않으려면 따로 영업 비밀 심사를 거쳐야 한다.

재계 관계자는 11일 “R&D를 할 때는 화학물질 배합을 바꿔가며 쓰고, 그 결과가 기업의 노하우다. 그런데 산안법이 시행되면 물질을 바꿀 때마다 정부에 보고해야 하는데, 그 시간만큼 뒤처지는 것 아닌가”라며 “화평법에 따라 글로벌 회사들이 영업비밀로 삼는 화학성분까지 알아내서 등록해야 하는데 현실상 쉽지 않다”고 했다.

○ “취지 이해하지만 첩첩 규제 부담”


산안법과 같은 시기에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도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유해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기업에 통풍 등 안전설비를 의무화한 법으로 올해 말이면 유예기간이 끝난다. 화학접착제 생산 중소기업 A사는 이 법에 대비해 연 매출(550억 원)의 30%에 달하는 180억 원가량을 들여 공장시설을 고치고 있다.

화관법은 경북 구미시 불산 누출 사고를 계기로 사업장의 화학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화평법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계기로, 산안법은 하청업체 직원의 안전사고를 계기로 산업현장에서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산업계는 법의 취지와 방향은 맞는다고 본다. 하지만 엄격한 규제를 담은 3개 법이 한 번에 시행되면 “안 그래도 뒤떨어진 한국 소재·화학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소재 경쟁력이 일본에 뒤떨어진 것은 무려 100년이 넘은 일본의 업력을 따라잡기 힘들고 기술력, 인재 부족 등의 영향도 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는 정부가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가장 큰 불만 중 하나는 3개 법 모두 화학물질 정보를 일일이 등록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 제조사 관계자는 “글로벌 화학업체들이 기술 유출 등을 이유로 성분 공개를 꺼리는 데다 고유 물질명이 없는 화학물질도 많다”며 “사전 신고를 못 한 이런 물질들의 등록이 늦어지면 꼼짝없이 처벌을 받을 판”이라고 말했다. 환경부는 당장 단속에 들어가지는 않겠다고 했지만 기업들 사이에서는 “언제든 범법자로 몰려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화학업계 중소기업 대표는 “법을 잘 지키려면 화학 분야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며 “가뜩이나 중소기업은 인력난이 심한데 이런 고급 인재를 구하기는 훨씬 어렵다. 전문가가 없어 실수로 법을 어겨 처벌을 받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 유럽보다 엄격한 규제



화평법은 당초 유럽연합(EU)의 ‘화학물질 등록·평가제도(REACH)’를 벤치마킹했지만 규제 강도는 훨씬 높다. 새로 도입되는 화학물질의 경우 EU는 1t 이상 유통하는 경우만 등록 의무를 주지만 우리는 100kg 이상이면 적용된다. 이 때문에 주로 소재 개발을 담당하는 중소기업까지 부담이 커진다는 불만이 제기된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화평법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R&D 의지를 꺾는 과도한 규제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며 “이제 와서 왜 R&D를 안 했는지 질책하는 듯한 분위기가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또 화관법과 산안법은 정부가 내려보낸 감독관이 자의적 판단으로 공장 가동을 멈출 수 있도록 했다. 화관법에 따라 유해물질 취급 시설 충족 기준이 79개에서 413개로 늘어난 데다 공장 가동을 멈춰야 가능한 저압가스 배관 검사 등이 의무화됐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생산라인은 몇 분만 멈춰도 최소 수백억 원대의 손실이 발생하는데 중단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고 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일본보다 엄격한 EU의 제도를 도입한 것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반영된 것”이라면서도 “업계와의 소통 폭을 더 넓혀 현장의 어려움을 최대한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황태호 taeho@donga.com·강은지·허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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