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비닐봉투에 오이 3개를 집어넣던 야채가게 주인의 손이 멈칫했다. 이어 주인의 시선은 김지현 씨(37·여)가 들고 있던 천주머니로 향했다. 지난달 27일 김 씨는 평소처럼 장바구니와 천주머니를 들고 서울 강동구 길동복조리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그는 “비닐봉투를 쓰지 않겠다”며 채소가게 주인에게 천주머니를 내밀었다. 주인은 “이런 손님이 가끔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 씨는 “유치원에 간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 천주머니 몇 개만 챙기면 장을 보고 오는 데 전혀 부담이 없다”고 설명했다.
대형마트의 경우 비닐봉투 사용이 금지됐지만 전통시장은 예외다. 한 번 장을 보면 검은 비닐봉투가 잔뜩 쌓인다. 자원순환사회연대가 지난해 6월 서울 전통시장 상인 4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게 한 곳에서 한 달에 비닐봉투 1000여 장을 사용 중이었다. 추석 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제수용품과 선물을 사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면서 비닐봉투 사용이 덩달아 증가한다.
비닐봉투도 깨끗이 사용해 배출하면 재활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기름 등 이물질이 묻으면 재활용이 어렵다. 대부분 종량제봉투에 담아 버릴 수밖에 없다. 분리 배출이 어려운 대표적인 품목 중 하나다. 한국의 연간 비닐봉투 사용량은 2015년 기준으로 약 211억 장. 한 해 동안 1인당 약 410장을 사용하는 셈이다.
하지만 소비자가 마음만 먹으면 전통시장에서 비닐봉투 사용을 줄일 수 있다. 과일이나 채소를 대부분 낱개 판매하기 때문이다. 장바구니 하나만 준비하면 비닐봉투뿐 아니라 농산물을 개별 포장하는 플라스틱 사용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백화점이나 마트의 경우 대부분의 제품이 플라스틱 포장재에 담겨 있어 ‘장바구니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전통시장에서 사용할 장바구니는 커다란 에코백도 좋고, 바퀴가 달린 카트 형태도 좋다.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 등 일부 전통시장에서는 장바구니를 대여해 주기도 한다. 장바구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회용 주머니다. 각각의 물건을 담을 속비닐 역할을 대신한다. 김 씨가 애용하는 천주머니 외에 신발을 살 때 넣어주는 부직포 주머니나 양파·옥수수 망, 작은 에코백, 실리콘 주머니 등을 활용하면 채소나 과일 등을 비닐봉투 없이 살 수 있다. 환경부도 최근 전통시장을 중심으로 ‘다회용 주머니 확산 캠페인’을 시작했다.
소비자가 조금 더 신경 쓴다면 밀폐용기를 이용할 수 있다. 명절을 앞두고 준비할 반찬이나 전 등은 보통 무게로 판매하기 때문에 밀폐용기에 담으면 편하다. 비닐봉투에 담았을 때 다시 집에서 다른 용기에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도 덜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먼저 거절하기’다. ‘비닐봉투 없이 장보기’를 실천한 사람들은 전통시장에서 “‘비닐봉투 안 주셔도 됩니다’라고 먼저 말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마포구 망원시장에서 비닐봉투 사용 줄이기 운동을 하는 시민모임 ‘알맹’의 고금숙 활동가는 “시민들이 ‘먼저 포장재를 안 쓰겠다’고 요구하면 자연스럽게 상인들도 동참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환경단체인 그린피스 코리아는 “시민들이 먼저 일회용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을 권리를 요구하면 결국 시스템이 바뀐다”고 설명했다.
백화점과 마트, 대형 슈퍼마켓의 비닐봉투 사용 제한도 시행 6개월 만에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속비닐 사용량(32만33t)은 지난해 상반기(80만9641t)에 비해 60.5% 이상 줄어들었다. 환경부는 종이컵과 빨대 등 다른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기 위한 일회용품 감축 로드맵을 확정해 10월 중 발표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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