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양식 맞추느라 ‘F7 계속 누르기’ 야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14일 03시 00분


[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2020 新목민심서-공직사회 뿌리부터 바꾸자]
각 부서 보고서 취합하는 공무원, 서식 통일 “호치키스 찍기” 자조
“절차-형식이 전체 업무 중 40%… 지나친 형식주의 개선 시급”

공무원 사회에서 이른바 ‘호치키스 찍기’라 불리는 업무가 있다. 호치키스는 종이찍개(스테이플러)를 일컫는 말로, 이 업무는 각 부처나 부서의 정책을 취합해 하나의 보고서로 만드는 일이다. 한 경제부처에서 예산 총괄 업무를 하는 사무관의 인트라넷 아이디(ID)가 ‘호치키스’일 정도로 관료 집단에서 많이 쓰는 용어다.

호치키스 찍기를 맡은 공무원은 그날 일찍 집에 가는 것을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 각 부처에서 여러 공무원이 머리 싸매고 만든 정책을 하나로 엮으려면 당연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밤늦은 시간까지 이들이 공을 들이는 부분은 따로 있다.

“아래아한글의 문서 작업 단축키 중 F7이 있습니다. 문서의 위아래, 양옆의 여백을 얼마나 둘지, 머리말과 꼬리말의 위치는 어떻게 할지 설정하는 단축키이죠. 문서 취합하는 직원들 보면 계속 F7만 누르고 있는 거예요. 각 부처의 문서 양식을 통일해야 한다는 겁니다.”(중앙부처 공무원 A 씨)

공무원들이 이 업무를 밤늦은 시간까지 하는 것은 부처나 부서마다 보고 양식이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부 상사들이 보고서의 내용보다도 겉포장이나 통일성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한 경제부처 공무원은 “윗분들은 보고서가 한눈에 보기 좋아 보이면 왠지 내용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며 “결국 아랫사람들은 줄 간격과 글자 모양에 병적으로 집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많은 공무원들은 공직사회가 민간기업에 비해 지나치게 ‘형식’과 ‘절차’에 매몰돼 있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내놓는다. 일을 하다 보면 실제 업무 성과보다 보고서 양식 같은 형식에 더 신경을 쓴다는 것. 한 사무관은 “전체 업무를 100으로 치면 이런 절차와 형식을 위한 업무가 40 정도 된다. 많은 공무원들이 이런 거 한다고 지금도 야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주무관, 담당 사무관, 과장, 국장, 차관, 장관에 이어 청와대까지 가야 하는 보고서라도 있으면 이른바 ‘화장발’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청와대가 비대해지면서 각 부처가 올려 보내는 보고서가 더 많아지고 있다는 불만도 나온다.

공무원들이 공문 작성, 회의 등 절차에 집착하는 것은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감사원 감사 등이 있을 때 근거 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로 인해 정책 결정이나 행정 서비스가 지체되는 등 부작용이 더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건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형식이나 절차를 중시하는 문화는 공무원의 재량권 남용을 막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서도 “하지만 지금 우리 공직사회는 지나친 형식주의로 과도한 행정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종=송충현 balgun@donga.com·남건우 기자
#공직사회#공무원#호피키스 업무#양식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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