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임과 신중함[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29일 03시 00분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인생은 선택입니다. 선택은 대개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일입니다. 고약하게도 그 둘은 서로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을 극단적인 두 집단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일에 신중한 사람들입니다. 늘 많이, 깊게 생각합니다. 한참 뒤에도 생각에 다시 빠져서 생각 자체가 숙성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겨우 결론을 내립니다. 결론 뒤에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다시 신중해집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고, 아는 길도 물어 가고, 얕은 내도 깊게 건너야 한다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달리 모든 일에 지나치게 적극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의 행동을 먼저 하고 생각은 뒤에 합니다.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은 신중함과 적극성 사이에서 갈등하며, 망설이고, 주저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소신을 지킬 것인가, 남들이 살아가고 행동하는 식을 따를 것인가. 이 역시 망설임의 대상이 됩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안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일을, 이런저런 이유로 망설이며 살아갑니다. 그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영리하게도 ‘소신 따로, 행동 따로’를 삶의 전략으로 선택합니다. 사회적 공정의 차원을 논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갈등 관리 차원에서는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만.

‘망설임’은 ‘이리저리 생각만 하고 결정하지 못함’입니다. 정신분석적 용어로는 ‘양가감정(兩價感情)’이라고 합니다. 같은 일, 사람, 대상에게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을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망설임이든 양가감정이든 뒤집어보면 상반되는 두 힘이 충돌하면서 마음에 흙먼지를 일으켜서 제대로 못 보도록 막고 있는 겁니다.

망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려면 누구나 망설입니다. 누구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 전에 망설입니다. 둘째, 실패에 대한 걱정도 작용합니다. 성공을 포기하고 실패를 택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니 실패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망설일 수밖에 없겠지요. 셋째, 망설임은 자율성이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경우에도 문제는 시간입니다. 망설이는 사람은 늘 시간에 쫓깁니다. 누구도 시간의 흐름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통제 불능인 시간에 맞서 그나마 통제 가능한 결정을 서둘러야 할 시점이 점점 다가옵니다. 차라리 서둘러서 행동을 해버리고 실수는 나중에 자책하겠습니까? 신중하게 생각하다가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을 허비하고 후회하겠습니까? 수술 환자를 앞에 두고 망설임과 결단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외과 의사의 결정적 순간과 같은 도전이 우리에게 닥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고 봅니다.

망설임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진단이 중요합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빌려 설명해 보겠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망설임이 쓰고 등장하는 ‘신중함의 가면’을 과감하게 벗겨야 합니다. 사려 깊고 신중해 보이지만 뒤집어보면 신중함이 때로는 망설임의 보호막임을 우리 모두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좀 더 깊게 분석하면 이렇습니다.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해야만 하는 일을 망설이고 있다면 일단 ‘마음속 웃어른’인 초자아(超自我)가 개입한 겁니다. 자아(自我)가 소망, 초자아, 현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해야 하지만 허약하거나 정지돼 있는 상황입니다. 망설임은 부족하거나 방전된 자아 활력의 문제입니다.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그 뒤에도 계속 망설이고만 있다면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비어 있는, 골다공증 같은 자신의 부족한 능력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 겁나서 주저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허물어진 집을 고치겠다고 어설프게 나선 목수와 같습니다. 필요한 연장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목수의 정체성은 공사 현장을 혼돈으로 빠뜨립니다.

망설이는 사람의 마음은 이미 스스로 정해 놓은 틀이 지배합니다. 틀을 벗어나면 위험할 것이라는 근심으로 차 있습니다. 결정을 계속 미루면, 결국 난처해집니다. 난처해지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판단력이 떨어집니다. 일이 풀리는 선순환이 아닌, 일이 더욱 꼬이는 악순환으로 끌려들어 갑니다.

망설임을 둘러싼 갑옷은 불확실성입니다. 불확실성 중에서도 제일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은 현실 여건이 아니고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불확실성입니다.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생각에서 벗어나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을 하나만 든다면? 망설임을 이기는 적극성은 놀랍게도 틀에 박힌, 일상의 작은 힘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망설임의 대상을 틀에 박힌 일상의 일로 조금씩 모습을 바꾸어 시작하고 차차 쌓아나가면 망설일 필요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양치질이나 세수하기가 일관성 있는 일상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자아의 행동력, 실천력을 서서히 배양할 수 있다면 효과적입니다. 말은 쉽고 이루기는 어렵습니다만. 소소하더라도 반복 실천이 필요합니다. 올해 어떤 일을 계획하셨나요? 신중함을 내세워 망설이고만 계시나요? 일단 시동을 걸고 움직인 후에 더 생각하실 건가요? 벌써 첫 달이 훅 지나고 있습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망설임#신중함#마음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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