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교통할인” 25억 받아 엉뚱한 사업… 겉도는 국민참여예산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4일 03시 00분


국토부, 당초 국민 제안과 달리 일반인 대상 마일리지연계 사업
“1억은 본래 사업에 썼다” 해명
복지부, 사업 겹친다며 퇴짜 놓고는 기존 사업 예산 늘리는 데 활용도
전문가 “내실있는 운영법 고민을”

‘교통수단별로 이용할 수 있는 카드가 달라 노인들이 불편해한다. 그러니 한 장의 교통카드로 통합하자.’

지난해 4월 유모 씨는 국민참여예산 홈페이지에 이 같은 제안을 올렸다. 유 씨의 제안은 타당성을 인정받았고 실제 올해 국토교통부 예산으로 25억7500만 원이 책정됐다. 하지만 정작 이 예산은 ‘광역알뜰교통카드 연계 마일리지 지원’이라는 엉뚱한 사업에 쓰일 예정이다. 광역알뜰교통카드는 스마트폰 앱을 통해 걷거나 자전거를 탄 거리를 마일리지로 환산해 교통요금을 깎아주는 제도로 노인 교통 할인과는 상관이 없다. 국토부 담당자는 “예산 대부분은 마일리지 지원에 쓰이지만 25억 원 중 1억 원은 노인 교통카드 통합을 위한 연구용역에 쓰기로 했다”며 “국민참여예산의 당초 제안과 아예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지난해 시작된 국민참여예산 제도가 실제 예산 집행 과정에서 당초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제도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국민이 직접 정책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예산 편성에 참여하자는 뜻으로 마련됐다.

3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올해 국민참여예산에는 신규로 38개 사업, 1057억 원이 반영됐다. 기존 사업을 계속 추진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2711억 원으로 지난해(928억 원)의 3배에 가까운 규모다.

국민참여예산은 국민이 예산 편성 과정에 직접 참여해 실생활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하고 재정 운영의 투명성을 높인다는 취지로 2018년 시범 도입됐다. 전용 홈페이지를 통해 누구나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 채택된 제안은 담당 부처와 전문가로 구성된 지원협의회의 심사와 토론, 400명 규모인 국민예산참여단의 숙의와 선호도 조사 등을 거쳐 반영된다.

하지만 실제 예산 집행 과정을 추적해 보면 노인 교통카드 통합처럼 기존 제안 취지와 다르게 반영되는 사업이 많다. 가령, 학생들을 위해 학교에 실내정원을 조성하자는 국민 제안 예산은 산림청의 생활밀착형 숲 조성 사업(50억 원)으로 전용됐다. 이는 지하철역, 도서관 등 공공시설 내 실내정원을 조성하는 것으로 학교 내 실내정원 조성과는 관련이 적다.

기존 사업의 예산을 늘리는 데 참여예산이 활용되기도 했다. 보건복지부의 홀몸노인 응급안전 알림 서비스는 올해 165억 원 예산 중 60억 원이 참여예산으로 반영됐다. 처음 관련 제안이 접수됐을 때만 해도 복지부는 이미 시행하고 있는 사업과 겹친다며 ‘부적격’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왕 국민 제안이 올라왔으니 기존 사업의 예산을 더 늘리자”는 쪽으로 부처 간에 의견 조율이 됐다. 중소벤처기업부의 벤처 인수합병(M&A) 활성화 지원(2억 원),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수입김치 유통 실태 조사(4억 원) 등도 기존 사업에 참여예산이 추가로 반영된 케이스다.

집행률이 낮은데도 예산이 더 배정되는 사례도 많다. 지난해부터 참여예산으로 반영돼 올해도 추진하는 25개 사업 중 11개는 지난해 11월 말 기준 예산 집행률이 70%를 밑돌았다. 이 11개 사업 중 6개는 오히려 지난해보다 올해 예산이 늘었다.

전문가들은 당장 사업 수나 규모를 늘리기보다 내실 있게 제도를 운영할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참여예산 선정 과정에 참여했던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국민 참여 기간이 짧고 관료들이 주도적으로 심사하다 보니 실적 중심으로 운영되는 한계가 있다”며 “작은 규모라도 국민 참여가 얼마나 의미 있게 이뤄지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세종=주애진 기자 jaj@donga.com
#국민참여예산#노인 교통할인#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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