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2일 미국 공군전투사령부(ACC)는 놀라운 문건을 공개했다. 바로 고등전술훈련기(ATT) 획득 사업에 대한 정보요청서(RFI)다. 이미 차세대 고등훈련기로 보잉 T-7A를 선정한 미 공군이 T-7A 획득과 별개로 또 다른 훈련기 소요를 발표한 것이다. 10월 15일 미 공군협회가 발행한 ‘에어포스매거진’ 보도에 따르면 미 공군은 이번 사업을 통해 조종사의 전술 입문 훈련을 소화할 수 있는 신형 훈련기 100~400대를 도입할 예정이다. 미 공군 관계자는 “이번 사업이 기존 T-X 사업을 수주한 T-7A 파생형을 도입하려는 것이냐”는 질문에 “요구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모든 공급업체에 기회가 열려 있다”고 답했다.
“모든 업체에 기회 열려 있다”
T-X 사업에서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손잡고 T-50A를 제안했다 고배를 마신 록히드마틴이 미 공군의 RFI 발표 사흘 뒤 사업 참가 의사를 밝혔다. 록히드마틴 대변인은 “(군용기) 개발과 생산, 업그레이드, 그리고 반응 속도를 더욱 높이는 디지털 엔지니어링과 개방형 아키텍처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뤘다. 미 공군의 사업 요구사항을 면밀히 검토해 최상의 솔루션을 제공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록히드마틴이 어떤 기종으로 도전할지 밝히진 않았지만, 미 공군의 사업 타임라인을 고려했을 때 선택지는 T-50A가 유일하다. 2018년 9월 T-50A는 보잉-사브 컨소시엄이 제안한 모델에 충격적인 패배를 경험한 바 있다. 당시 경쟁 기종 중 실적 기체를 갖춘 것은 T-50A가 유일했다. 성능·제원도 경쟁기를 압도했기에 수주가 유력하다는 관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T-50A는 보잉-사브 컨소시엄이 내세운 파격적인 가격에 무너졌다.
당초 미 공군이 신형 훈련기 351대 도입에 책정한 예산은 197억 달러(약 23조2755억 원)였다. 록히드마틴-KAI 컨소시엄은 이보다 약간 낮은 160억 달러(약 18조9000억 원)를 제안했다. 보잉-사브 컨소시엄도 비슷한 가격을 써 낼 것으로 예상됐으나 실제는 달랐다. 92억 달러(약 10조8700억 원)에 완성 기체 475대, 지상훈련체계 120대를 공급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서를 낸 것이다. 정치적 판단도 보잉-사브 컨소시엄 승리에 한몫했다. 록히드마틴은 미 공군의 신형 전투기 사업에서 잇달아 승리해 F-22, F-35 주계약자로 향후 수십 대 일감을 확보했다. 반면 보잉은 F-15E 성능 개량과 F/A-18E/F 추가 조달 외에는 이렇다 할 신형 전투기 수주 성과가 없었다. 미국 정치권에서는 보잉에 어느 정도 힘을 실어줘야 록히드마틴의 독과점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러한 조건이 맞물려 T-X 사업은 예상을 깨고 보잉 측이 수주했다.
미 공군 차세대 고등훈련기로 선정된 보잉-사브 컨소시엄의 T-X는 T-7A 레드호크(Red Hawk)라는 제식명을 부여받고 본격적인 전력화에 나섰다. 보잉-사브 컨소시엄은 2022년까지 양산 모델 개발을 완료하고 2023년부터 생산에 돌입, 2024년 초기작전능력(IOC), 2034년 완전작전능력(FOC)을 확보할 예정이었다. 미 공군의 이 같은 행보에 노후 훈련기를 대체하려는 주요 우방국들의 T-7A 구입 문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초 T-7A는 4차 산업혁명의 상징처럼 인식됐다. 통상 군용기 개발은 10년 이상 시간이 소요된다. 반면 보잉-사브 컨소시엄은 T-7A 유체역학 평가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하고 주요 부품을 3D(3차원) 프린터로 생산하는 등 혁신적인 공정으로 개발 기간을 5년 이내로 단축하겠다고 공언했다.
치명적 결함 ‘윙 록’
신기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독이 된 것일까. T-7A 개발 과정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해 납품에 빨간불이 켜졌다. T-7A 개발 지연을 일으킨 가장 큰 문제는 비행 안정성이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반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해 실제 비행에서 문제가 터지고 만 것이다. 윙 록(wing rock)도 심각한 문제였다. 윙 록은 높은 받음각(angle of attack), 즉 항공기가 급기동하는 상황에서 날개를 따라 흐르는 공기 진동이 항공기 전체에 퍼져 진동하는 현상이다. 윙 록이 발생하면 항공기는 실속(失速)에 빠져 양력과 조종성을 잃고 추락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항공기로서는 그야말로 치명적 결함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날개나 동체 형상을 전면 재설계하거나, 기체 소재 및 골격 변경으로 구조강성을 높여야 한다. 당연히 비용이 크게 늘고 설계 변경, 검증에 시간이 소요돼 전력화 일정도 늦춰질 수밖에 없다.
미 공군이 기존에 운용하던 고등훈련기 T-38은 이미 심각하게 노후한 상황. T-7A 전력화가 차일피일 미뤄지자 미 공군은 당장 임박한 전력 공백을 메우고자 소량의 훈련기를 임대하는 RFX(조종사 양성 혁신) 사업을 추진하고 신규 훈련기 사업 소요를 제기한 것이다. T-7A 사업 실패에 대비한 보험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8년 수주전에서 석패한 T-50A가 다시 강력한 다크호스로 부상하고 있다. 설계는 비교적 오래됐으나 확실히 검증된 성능과 신뢰성을 갖추고 있어서다. 게다가 세계 각국에 이미 160여 대가 수출돼 훈련기는 물론, 경전투기로도 운용될 만큼 고등훈련기 중 최고 성능을 자랑한다. 특히 미 공군은 이번에 도입할 고등전술훈련기를 훈련 시 가상 적기나 저강도 분쟁에서 공격기로 활용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적어도 미군 현용 주력 전투기와 모의 공중전이 가능할 정도의 기동성과 무장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아직 비행 안전성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T-7A에 비하면 T-50A가 월등히 앞선다.
미 공군은 ATT 사업 참가 요구 조건으로 △마하 0.9 이상 속도 △대화면 디스플레이 조종석 △무장 및 다양한 미래 임무 장비 탑재가 가능한 하드포인트(무장 장착대) △90분 이상 체공 능력 및 최소 30분간 전술 고기동 능력 △4만5000피트(1만3716m) 이상 실용 상승 고도 △7.5G 이상 중력 가속도 내구성 △전술 전투기로 실전 투입할 수 있는 제반 능력 등을 내걸었다. 이미 개발됐거나 가까운 미래에 등장할 고등훈련기 가운데 이 같은 조건을 만족하는 기종은 T-50A뿐이다. KAI와 록히드마틴이 이번 ATT 사업에서 다시 의기투합해 기존 T-50A를 조금만 손본다면 지난 패배를 설욕할 수 있을 것이다. 미 공군에 대량 납품이 성사될 경우 미국 동맹국으로부터 러브콜이 쏟아질 수도 있다.
사업 결과 낙관한 韓 정부
당장 필요한 것은 두 업체 간 신뢰 회복이다. T-X 사업 당시 록히드마틴은 사업 결과를 지나치게 낙관한 탓에 적극 협력하지 않은 한국 정부와 KAI 측에 유감을 표한 바 있다. T-X 사업이 한창 진행되던 2017년 서울에어쇼에 참석한 록히드마틴 관계자는 한국 정부에 “미국 내 상황이 다급히 돌아가고 있다”며 수주를 위한 정책적 지원을 호소했으나 무위에 그쳤다. 결국 수주 실패와 비즈니스 파트너십 균열로 이어졌다. 실제로 록히드마틴은 이번 사업에서 KAI와 손잡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록히드마틴은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 팜데일에 위치한 스컹크웍스 설계팀 제42시설에 항공기를 빠르게 설계해 시제기를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설비도 마련했다. 보잉-사브 컨소시엄처럼 수개월 내 기체 설계, 시제기 생산을 마치고 독자 사업에 나설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전체 사업 규모 10조 원을 가볍게 뛰어넘을 이번 사업의 수주를 위해 이미 미국 업체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KAI가 다시금 세계 훈련기 시장에서 선두에 서기 위해서는 정부의 전략 마련과 적극적인 지원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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