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석 비가 전부…너무나 소박한 신격호 회장의 묘소[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월 23일 09시 00분


거인(巨人)의 무덤은 소박했다
신격호 롯데 창업주의 울주 묘소 “거기 가 봤나?”
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나는 늘 자식들에게 내 사후(死後) 묘소는 소박하게 꾸미라고 신신당부했다.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보면서도 나는 화려한 조형물은 생자(生者)를 위해 만들어야지 사자(死者)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향 땅의 안온한 품에 안기기만 하면 될 뿐이니 거창한 비석이나 높은 봉분(封墳)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 있는 신격호 롯데 창업주의 묘소. 재벌 회장의 묘소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박하다. 사진 롯데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 있는 신격호 롯데 창업주의 묘소. 재벌 회장의 묘소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박하다. 사진 롯데


●너무나 소박한 롯데 창업주의 묘소


2년 전인 2020년 1월 19일 영면한 롯데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의 묘소는 고향인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선영에 조성됐다. 재벌 회장의 묘소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너무나 소박한 무덤이었다. 무덤 앞의 상석도 없을 분 아니라 작은 봉분에다 벌레를 방지하기 위한 노송(老松) 나무가 전부다. 사자(死者)의 위용을 뽐내듯 묘역 주변을 지키는 비석 또한 이 곳에선 찾아보기가 어렵다. 여느 필부필남의 묘소와 다름없다. 수중에 달랑 110원을 들고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에서, 그리고 고국에서 ‘롯데 신화’를 일군 창업주가 잠들고 있는 곳은 세속의 영달(榮達)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무덤 한 편에 있는 와석(臥石)만이 이 곳이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무덤임을 알린다.

“여기 / 울주 청년의 꿈 / 대한해협의 거인

신격호 / 울림이 남아 있다

거기 가봤나?
2020년 1월 19일
영면”


‘거기 가봤나’는 신격호 명예회장이 평소 임직원들에게 많이 던졌던 질문이다. 현장을 중시하는 경영과 고인의 생전 부지런함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신격호의 묘소는 둔기리 한 야산에 위치해 있다. 고향 생가가 수몰(水沒)돼 거처를 잃은 아버지를 위해 마련한 2층 양옥 별장과는 1km, 신격호의 부친 선인(先人) 묘소가 있는 언양읍 구수리와는 3km 거리에 있다. 고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옛 둔기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비즈니스로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마지막 거처는 그가 유소년 시절을 보낸 고향 땅이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인가. 신격호의 집이 있었던 둔기마을은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기치로 울산공업단지가 조성될 무렵 용수(用水) 조성을 위해 인근에 대암댐이 건설되면서 1969년 동네가 전부 물에 잠겼다.

신 명예회장은 고향이 물에 가라앉자 거처를 잃은 아버지를 위해 1970년 지금 자리에 있는 2층 양옥 별장을 지었다. 2층 창 너머로 옛 삶의 터전을 바라보던 선친(先親)은 별장에서 2년여를 살다가 1973년 작고했다. 신 명예회장은 회고록에 “야반도주하다시피 일본으로 떠나 오래 소식을 전하지 못한 이 장남의 불효를 애절하게도 이제는 갚아드릴 방법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신격호 명예회장 부친이 말년에 기거한 울주 별장 모습. 사진 롯데
신격호 명예회장 부친이 말년에 기거한 울주 별장 모습. 사진 롯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신격호 회고록에선 마지막 장에 ‘내 가족 이야기’가 나온다.

재벌 회장의 삶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참으로 소박한 일상들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별장에 부속 숙소를 지어 가까운 혈족들이 모여 함께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나도 별장에 내려가면 그들과 어울리며 응접실에서 한국 대중가요를 즐겨 듣는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내 사랑 내 곁에’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 ‘한계령’ ‘칠갑산’ ‘만남’ ‘무시로’ 등이다. 박목월 시인의 ‘사월의 노래’라는 시에 김순애 작곡가의 곡으로 만들어진 가곡도 애청(愛聽)곡이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라는 가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음이 울적할 땐 불경을 읽거나 반야심경 병풍을 펼쳐놓고 독경한다.”

“관자재보살이 반야 바라밀다를 깊게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이라는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났도다.”

재벌의 삶은 아주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신격호는 가족을 중시하고 친척과 가깝게 지내면서 일상의 소중함을 즐길 줄 아는 범인(凡人)이었다. 일본에 있으면서도 한국의 대중가요를 즐겨 부르고 소소한 일상과 가족이라는 편안한 굴레를 가슴 깊이 간직하는 가장(家長)이기도 했다.

신격호는 또 회고록에서 신혼 초에 아내에게 “정원에 빨간 기와가 있는 집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일화를 털어놓았다. 나중에 집을 지을 때 정원 터를 넓게 잡아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사업에 몰두하느라 함께 해외여행을 갈 여유는 없었다. 결혼하고 25년이 지난 뒤에야 나이아가라 폭포로 첫 해외여행을 갔을 정도였다. 한국 속담에 ‘마누라 자랑하는 팔불출’이라지만 나는 평생을 올곧게 살며 나를 내조한 품격 있는 아내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1941년 겨울 스무 한살 조선 청년 신격호는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우유와 신문배달을 하면서도 고학을 이어가 와세다실업고 야간부에 편입을 했다. 일본에 건너간 지 9년 뒤인 1950년 9월 한국전쟁 와중에 다케모리 하츠코와 결혼했다. 이로부터 25년 뒤에야 부부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했으니, 그게 1975년 무렵이다. 한국에 롯데제과(1967년) 호텔롯데(1973년) 롯데칠성(1974년) 등의 회사를 설립한 후에야 부부 여행을 미국으로 떠난 것이다, 그 해엔 실업야구단 롯데자이언츠가 창단된 해였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런 경구의 깊은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회고록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1986년 7월 골프 모임을 가진 류찬우 풍산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 신격호 롯데 회장. 사진 롯데
1986년 7월 골프 모임을 가진 류찬우 풍산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 신격호 롯데 회장. 사진 롯데


●이집트 피라미드 수학여행이 남긴 것


1994년 4월 신격호는 이집트 여행을 갔다. 피라미드 구경을 위한 수학여행이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시내 곳곳엔 흙더미로 만든 움막집이 즐비했다. 집 안에서 어른거리는 주민들의 행색은 몹시 남루했다. 한국의 포니자동차가 카이로에선 택시로 쓰이고 있었으니 중대형차가 즐비한 서울과는 얼마나 다른 모습인가.

카이로에서 승용차로 30분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피라미드를 볼 수 있었다. 피라미드 밑변이 230m로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걸어가는 데 한참 걸렸다. 2.5t 무게의 돌을 무려 230만개나 쌓아올려 만든 것이라는 설명에 깜짝 놀랐다. 이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10만 명이 20년 동안 매달렸다는 기록이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 기록돼 있다.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서니 도굴꾼들이 내부를 마구 뒤져놓은 바람에 볼 것은 마땅히 별로 없었다. 하지만 정교한 이음매로 연결된 돌덩어리를 손으로 더듬기만 해도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경외심이 느껴졌다고 그는 기억했다. 컴컴한 피라미드 속을 사다리를 타고 이리저리 헤매는 기분은 신비감 자체였다. 영겁(永劫)의 시간을 뛰어넘어 온 듯한 적요(寂寥)를 느낀 신격호는 마치 광활한 우주 속에서 유영(遊泳)하는 기분을 느꼈다.

1994년 4월 이집트 피라미드 방문을 하고 있는 신격호 회장(왼쪽)과 건축가 오쿠노 쇼(가운데) 사진 롯데
1994년 4월 이집트 피라미드 방문을 하고 있는 신격호 회장(왼쪽)과 건축가 오쿠노 쇼(가운데) 사진 롯데


●파라오의 무덤과 카이로의 움막집


신격호는 이 거대한 피라미드 앞에서 인간의 도전 정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몸을 떨었다. 설계자와 시공자, 공사감독관, 일꾼 등 오랜 세월 전 피라미드를 만든 사람들에게 후세로서 저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를 다녀 온 신격호의 머리 속에선 피라미드의 잔상이 떠나지 않았다. 거대한 피라미드의 위용, 피라미드 속 안의 신비로움, 이런 역사(役事)를 만든 이집트인들, 그리고 오늘날 수도 카이로의 남루한 서민들의 행색….

파라오의 무덤은 웅장했지만 정작 그 속의 삶은 어땠을까. 사자(死者)의 영예를 위한 생자(生者)의 희생은 어디까지 용납될 수 있을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관광지가 된 피라미드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인간의 불굴의 도전정신과 설계자와 감독관, 일꾼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신격호의 머리 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죽은 자를 위한 화려한 조형물의 가치란 무엇인가.

이윽고 신격호의 머리 속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랜드마크는 무엇인지에 모아졌다. 숭례문? 경복궁? 뉴욕은 자유의 여신상이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파리의 에펠탑, 런던은 빅벤, 그렇다면 서울엔 무엇이 있을까? (계속)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건설 현장을 방문해 공사 진척 상황을 보고 받는 말년의 신격호 명예회장. 사진 롯데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건설 현장을 방문해 공사 진척 상황을 보고 받는 말년의 신격호 명예회장. 사진 롯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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