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나 오늘 카리나랑 네컷 사진 찍은 거 인스타에 올렸는데, 봤어?” “오늘은 CGV에서 더보이즈 만나고, 내일은 에버랜드에 NCT 보러 가야 함!”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면 주목! 콘서트장이나 팬 사인회장에서만 최애를 만날 수 있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덕후들은 최애와 함께 커플 네컷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며, 영화관과 놀이공원에서도 최애를 만날 수 있다.
물론 ‘진짜’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공간을 찾고, 또 돈을 쓴다. (그것도 아주 많이!) 모든 게 모바일로 들어가는 지금, 방구석 덕질만 하는 덕후들까지 밖으로 불러낸 비결은 무엇일까. 최애와 더 가까워지고 싶고 일상에서도 만나고 싶은 덕심을 정확히 저격한 브랜드들의 전략을 살펴봤다.
"우리 데이트했어요"...최애와 함께 찍는 네컷 사진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젊은 세대의 약속 필수 코스로 자리 잡은 네컷 사진. 포토이즘, 인생네컷 등 대표적인 포토부스 브랜드들은 이를 ‘덕후’들의 필수 코스로도 자리 잡게 했다. 엔터사와 협업을 맺어 컴백이나 생일처럼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한정판 아이돌 프레임을 출시한 것. 팬들은 프레임 속 아이돌 포즈에 맞춰 함께 손하트를 만들거나 주먹을 맞대는 등 때로는 커플, 때로는 친구처럼 다정한 네컷 사진을 연출할 수 있다.
아이돌 프레임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다. 포토이즘이 지난달 공개한 아이돌 그룹 ‘엔하이픈’과의 컬래버 게시글은 X(옛 트위터)에서 약 2만 회 리트윗됐을 만큼 시선을 모았다. 필리핀 마닐라 SM몰에서 진행한 NCT 팝업스토어의 포토이즘 부스는 운영 기간 내내 줄이 길게 늘어섰다고 한다.
한 아이돌 팝업스토어에선 굿즈를 7만 원 이상 산 팬들에게만 프레임 촬영권을 지급한 바 있다. 미끼 상품으로 활용될 만큼 아이돌 프레임이 덕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는 방증이다. (단, 이같은 이벤트는 팬들의 반발을 살 수 있으니 주의하자.😡) 최애 아이돌과 네컷 사진의 컬래버를 염원하는 덕후들의 기도 글을 인터넷 곳곳에서 쉽게 볼 수도 있다.
보통 아이돌 프레임으로 찍는 네컷 사진은 한 번 촬영할 때 7,000원이다. 왜 덕후들은 실제 아이돌과 찍는 것도 아닌데, 일반 네컷 사진보다도 3,000원 가량 더 비싼 아이돌 프레임에 열광하는 걸까? 덕후들은 입을 모아 ‘가짜인 걸 알지만 진짜인 것만 같은 현실감’을 그 이유로 꼽는다.
내 가수를 만난다면 무조건 사진을 남기고 싶은 건 덕후의 당연한 마음일 테다. 그런데 굳이 공연장에 가지 않고, 집 바로 앞에서 최애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안 찍을 이유가 없다. 그것도 세팅된 무대의상이 아닌 사복 옷차림에 커플 포즈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인데, 촬영 한 번에 7,000원쯤이야 아깝지 않다. SNS에 올리면 머글들로부터 ‘남친/여친이냐’는 메시지를 받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물을 보면 덕후들의 광대는 한없이 올라갈 뿐이다.
조모씨(21, 더보이즈 선우 팬): 저는 가장 마음에 드는 컷을 잘라 지갑에 끼워 넣고 다니고 있어요. 찍을 때만 해도 현타가 오다가, 막상 사진이 프린트되면 정말 데이트한 것만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아져요.
김모씨(21, 더보이즈 선우 팬): 최애가 이어폰 한쪽을 나눠 주는 포즈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특히 무대 의상이 아닌 사복 착장 프레임은 제가 최애 옷과 조금만 맞춰 입어도 커플처럼 찍혀서 더 좋았어요.
요즘엔 영화 말고 '콘서트 필름' 보러 CGV 간다?
코로나19 이후 크게 상승한 콘서트 티켓값은 덕후들을 빈털터리로 만들었다. 최근 한 아이돌 콘서트의 경우 가수가 콧구멍 크기로 보이는 4층 좌석 가격도 15만 원을 웃돌았을 정도다. 그런데 요즘엔 더 저렴한 가격에,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콘서트가 있다고 한다. 바로 ‘콘서트 필름’이다. 영화관에서 영화 대신 공연 실화 녹화 영상을 상영해 주는 방식으로, ‘싱어롱’ 상영관에선 실제 콘서트 현장에 있는 것처럼 노래를 따라부르고 응원할 수도 있다.
‘영화는 망해도 콘서트 필름은 흥행한다’는 말이 돌 정도로 콘서트 필름은 인기몰이 중이다. 지난 10월 콘서트 필름 최초로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개봉한 ‘아이유 콘서트: 더 골든 아워’는 ‘오펜하이머’, ‘잠’ 등 내로라하는 영화들을 밀어내고 예매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무려 한 달간 20억 원의 흥행 매출을 올렸다. 2021년 방영된 오디션경쟁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의 일본판 출연으로 결성된 신인 보이그룹 ‘비퍼스트’의 콘서트 필름은 올해 초 일본 선개봉 때 ‘2023년 일본 음악 영화 동원 흥행 수입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영화관의 위기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는 지금, 콘서트 필름이 새로운 타개책이 될 수도 있는 이유다.
그런데 덕후들은 왜 굳이 콘서트 필름을 보러 가는 것일까? 사실상 실제 덕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집에서 유튜브로 콘서트 영상을 봐도 되는 게 아닐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대신 집에서 OTT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직접 만나 본 덕후들은 입을 모아 “콘서트 필름은 정말 콘서트에 간 것 같은 감동을 준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는 우선 초고화질의 영상을 꼽았다. 콘서트에서는 코딱지만하게 보이는 내 가수의 얼굴을 영화관에서는 대형 화면으로 볼 수 있다. 보통 콘서트장에서도 VIP석이나 S석에 앉지 못하는 이상 화면으로만 공연을 보는 경우가 대다수다. 어차피 화면으로 볼 것이라면 고화질의 영화관에서 보는 게 훨씬 좋다는 설명이다.
가격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콘서트 필름은 일반 영화보단 티켓값이 비싸지만, 콘서트 티켓값과 비교하면 약 8분의 1 수준이다. 아이유의 콘서트 VIP석 가격은 16만 5,000원이었지만, 콘서트 필름 가격은 주말 2D 상영관 기준 2만 2,000원이었다. 실제 콘서트만큼 티켓팅이 어렵지 않다는 것도 장점이다.
마지막으로 웬만한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음향도 한몫했다. 특히 극장은 공연장보다 훨씬 좁기 때문에 음악이 말 그대로 ‘온 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으로 즐길 수 있다. 콘서트를 이미 다녀온 덕후들도 콘서트 필름으로 다시 N회차 관람을 하는 이유다.
권모씨(20, 샤이니 팬): 저는 15년 동안 샤이니가 해왔던 콘서트를 모은 필름을 두 번이나 관람했어요. 첫 번째 일반 상영관에서 관람했을 땐 '내 가수들이 이렇게나 열심히 살았구나' 감동하며 울다가 나왔고, 두 번째 싱어롱 상영관에서 관람했을 땐, 다른 분들과 응원봉을 흔들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재밌게 즐기다 왔습니다. 한 달의 상영 기간 동안 영화관에서 주차별로 다르게 나눠주는 특전을 모으는 것도 묘미였던 것 같아요.
최애로 가득 꾸며진 놀이공원?
놀이공원도 이젠 아이돌 마케팅에 합세했다. 주로 1020 세대에게 큰 인기를 끄는 아이돌을 활용하면 어린 자녀를 가진 가족 외에 새로운 고객층을 확보하기 유리하기 때문이다. 아이돌과의 협업 자체만으로도 각종 SNS에서 화제가 돼 홍보 효과도 톡톡히 누릴 수 있다.
대표적으로 롯데월드는 지난 9월 엔하이픈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웹툰 '다크 문: 달의 제단' 속 세상을 실제로 구현하며 팬들을 유입했다. 곳곳에 웹툰에서만 보던 공간을 제작해 놓은 곳은 물론, 일곱 명의 주인공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까지 마련했다.
한정판 굿즈는 물론, 웹툰 속 교복을 입을 수 있는 이벤트까지 준비한 롯데월드의 마케팅은 성공적이었다. 오픈 후 롯데월드 공식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첫 티저 게시글은 조회 수가 60만 회를 돌파했고, 광고 영상 누적 뷰어는 2,000만을 넘었다. 특히나 엔하이픈이 해외 팬이 많은 만큼, 9월 한 달간 롯데월드를 찾은 해외 입장객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세 배 이상 늘었다. 당초 롯데월드는 10월 22일까지만 컬래버를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열띤 성원에 해당 행사를 11월 19일까지 연장했다.
또 다른 대표 테마파크, 에버랜드 역시 아이돌 마케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해 10월 SM엔터테인먼트와 아티스트 체험 공간 ‘EVER SMTOWN’을 조성한 것을 시작으로 SM 아티스트들의 IP를 활용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지난 8월에는 샤이니 IP를 활용해 만든 어트랙션, ‘렛츠 샤이니 랜드(Let’s SHINee LAND)’ 테마존을 공개하며 샤이니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샤이니를 테마로 꾸민 공간, 샤이니 멤버들을 형상화한 캐릭터들 샤이니 노래가 흘러나오는 놀이기구들, 샤이니와 에버랜드가 함께한 굿즈들까지. 이곳은 샤월*이라면 꼭 방문해야 하는 성지가 됐다. *샤월= ‘샤이니월드’의 줄임말로, 샤이니 팬덤 이름.
에버랜드는 SM 아티스트들과의 컬래버레이션 굿즈를 구매할 수 있는 공간인 ‘KWANGYA@EVERLAND’도 마련했다. 이곳은 오픈 당일 입장을 시작하자마자 1,000여 명이 몰리며 긴 대기 줄이 늘어섰고 반나절 만에 당일 판매 수량이 소진되는 등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김모씨(20, 엔하이픈 '니키' 팬): 저는 엔하이픈 웹툰을 마지막 화까지 다 보고 롯데월드에 방문했어요. 우선, 롯데월드 전체가 다크 문 콘셉트에 맞춰서 꾸며져 있어서 놀랐어요. 파티룸부터, 다크 문 캐슬(웹툰 속 공간), 교복 대여 패키지 이벤트까지 즐길 거리도 많았고요.
한모씨(22, 엔하이픈 '선우' 팬): 저녁엔 웹툰 OST와 함께 다크 문 캐릭터 애니메이션이 매직 캐슬에서 상영됐어요. 웹툰을 봤을 때도 OST를 좋아했었는데, 웅장하게 들으니 더 좋더라고요. 한정판 다크 문 굿즈들도 참신했어요.
어차피 덕질하는 거, 행복하게 덕질하고픈 게 덕후들의 마음. 톡톡 튀는 아이돌 마케팅으로 덕후들도 웃게 만들고 기업들도 웃게 만든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닐까? 앞의 세 가지 사례 모두 꼭 ‘진짜’ 아이돌과 만나는 것이 아니더라도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냈다. 덕후들이 갈증을 느끼는 포인트들을 캐치하거나, 이전엔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팬들의 니즈를 충족시켰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
하지만 과도한 욕심을 부리거나, 팬들을 섬세히 고려하지 못한 마케팅은 오히려 브랜드 이미지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팔도는 2PM 준호를 ‘팔도비빔면’ 모델로 내세워 제품 구매 고객을 대상으로 팬사인회를 여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행사 응모를 위해서는 2종의 포토카드를 모아야 했는데 아무리 제품을 구매해도 똑같은 포토카드만 나온다는 후기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우수수 쏟아졌다. 이에 ‘덕심을 이용한 상술’ 아니냐는 비난도 함께 쏟아졌다.
화장품 브랜드 네이처리퍼블릭은 광고모델 NCT 127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활용한 이벤트를 진행하며 “두 시간 동안 응모하신 분이 24명뿐이랍니다. 24명 중 3명 당첨. 괜찮은 확률 아닌가요?”라는 트윗으로 곤욕을 치룬 바 있다. ‘24명뿐’이라는 문구가 해당 아이돌을 깎아내리는 뉘앙스라며 팬들의 분노를 산 것. 아이돌 마케팅은 탄탄한 팬덤 고객층 확보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이들이 등을 돌리는 순간 큰 파급력을 가진 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늘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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