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야권에서는 ‘이조제이(以曺制李)’라는 신조어가 돌고 있습니다.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로 다른 오랑캐를 제압한다)에 빗대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간 미묘한 경쟁 관계를 보여주는 표현이죠. 이번 총선에서 비례대표 12석을 확보하며 원내 3당으로 입성하게 된 조국혁신당을 바라보는 민주당의 복잡한 속내가 느껴지는 듯 합니다.
“여러분들께서 걱정하실 내용도 없고, 혹시 오해할 내용도 없습니다. 민주당을 사랑하는 당원으로서 서운하실 수 있겠다고 생각되나 그리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번 총선에서 3선에 성공한 민주당 정청래 최고위원은 최근 이재명 대표의 온라인 팬카페인 ‘재명이네 마을’에 이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그가 조국혁신당의 워크숍에 참석해 국회 상임위 활동법과 TV토론 잘하는 법을 비롯해 SNS 활동에 충실하라는 등의 내용을 강연한 것을 두고 민주당 강성 지지층 사이에서 “‘해당(害黨)’ 행위가 아니냐”는 반발이 나오자 직접 진화에 나선 겁니다. 정 최고위원은 “본의 아니게 걱정을 끼쳐드렸다면 그 부분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제 잘못”이라며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은 제가 앞장서서 지킬 테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썼습니다.
단순 해프닝처럼 보이지만, 결국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간의 향후 관계 설정 과정의 험난함을 보여주는 예고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지금은 우당이지만, 곧 변수가 될 수도 있다”
조국혁신당은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 핵심 텃밭인 광주와 전남, 전북에서 모두 민주당의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을 앞섰습니다. 광주에선 조국혁신당(47.72%)이 더불어민주연합(36.26%) 10%포인트 넘게 앞섰죠. 광주 5개 전 지역구에서 여유 있게 이긴 덕입니다. 조국혁신당은 전남에서도 43.97%를 얻어 더불어민주연합(39.88%)을 앞섰습니다. 전남에선 총 22개 시군 가운데 목포 여수 순천 나주 광양 등 시 단위에선 조국혁신당이 전부 승리했습니다. 전북에서도 조국혁신당이 45.53%로 더불어민주연합(37.63%)을 앞선 가운데, 전체 15개 시군 중 무주 장수 순창 고창 부안 5곳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조국혁신당이 이겼습니다.
민주당으로선 총선에서 압승하고도 개운치 않은 배경이겠죠. 여유가 사라지니 화장실 들어올 때와 나갈 때가 다른 듯한 모습도 보이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이번 총선 과정에서 조국 대표가 “원내교섭단체 의석을 현행 20석에서 10석으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곧장 총선 공약으로 발표하며 화답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조국혁신당이 실제 원내교섭단체가 될 가능성이 커지니 민주당 내 반대 기류가 커지고 있습니다.
현재 12명인 조국혁신당이 20명의 원내교섭단체를 만들려면 진보당 3명, 새로운미래 1명, 기본소득당 1명, 사회민주당 1명 등에 더해 더불어민주연합 내 시민사회 몫 2석까지 총 8명을 ‘영끌’해야 합니다. 다만 이 중 진보당 2석(지역구 제외)과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시민사회 몫 2석은 더불어민주연합을 통해 들어온 비례대표이기 때문에 이들이 조국혁신당으로 옮기려면 더불어민주연합이 민주당과 합당한 다음, 민주당이 이들을 ‘제명’해줘야 합니다. 공직선거법상 비례대표 의원이 소속 정당을 탈당하면 자동으로 의원직이 상실되기 때문입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기본소득당과 사회민주당 출신들이 각자 본래 정당으로 돌아가는 건 자유이지만, 시민사회 몫으로 들어온 사람들까지 조국혁신당으로 가라고 제명해줄 순 없다”고 했습니다. 남 좋은 일 시키려고 판을 깔아준 건 아니라는 거죠.
민주당 최고위원들도 조국혁신당의 교섭 단체화에 일제히 반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재명 대표는 “조국혁신당이 교섭단체가 될 수 있도록 돕자”는 기류인데, 최고위원들은 “조국혁신당이 지금이야 ‘우당(友黨)’이지만, 22대 국회 개원 후엔 ‘변수’가 될 수 있다”고 결사반대한다는 거죠. 한 민주당 관계자는 “최고위원 중 상당수가 22대 국회에서 원내대표나 상임위원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 그들로선 새로운 원내 교섭단체가 생기는 것 자체가 골치 아픈 것”이라고 했습니다.
● 이재명-조국 “동병상련”
아직까지 이 대표는 조 대표에 대해 우호적인 듯 합니다. 두 사람은 함께 일했던 업연이나 개인적인 인연은 없다고 합니다. 이 대표 측 관계자는 “이 대표가 조 대표에 대해 개인적으로 동병상련을 느끼더라”며 “계속 사법리스크에 끌려다니고, 가족이 도륙당한 상황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끼는 듯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조 대표도 지난달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대표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는 취지로 말하더군요.
“과거 (이 대표가) 성남시장 시절 단식을 했는데, 너무 고생하시는데 중앙 정치인이 아니라서 아무도 관심이 없더라고요. 당시 저는 대학 교수였는데 (보기에) 안쓰럽더라고요. 연락이 돼서 가서 우려를 말씀드리고 거리에서 북토크를 했어요. 그 뒤로는 서로 만나서 얘기한 적은 거의 없는 거 같네요. (당 대표로서 예방한 이후엔 따로 연락 안 했는지?) 네. 그 분 당 대표 돼서 단식하시고, 저도 수사받고 할 때 서로 연락은 했죠. 서로 건강 조심하셔라, 수사받을 때 잘 받으셔라 하는 정도의 소통은 있었어요.”
이 대표도 이 때의 좋은 기억 때문인지, 총선 이틀 뒤인 12일 “조국혁신당도 중요한 정치세력이다. 당연히 존중하고 함께 가야 한다”며 “(조 대표와도) 조속히 만나 대화하고 협의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국혁신당과의 ‘범야권 연대’ 의지를 직접 적극적으로 밝힌 것이죠.
다만 두 사람의 브로맨스가 유지될 수 있을 진 모르겠습니다. 이 대표가 그렇게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죠. 총선 후 첫 한국갤럽 조사(4월 16~18일 전국 성인 1000명에게 전화 조사원 인터뷰. 표본오차 ±3.1%포인트에 95% 신뢰수준. 응답률은 12.1%)에 따르면 장래 대통령감을 묻는 말에 조국 대표는 7%로 이재명(24%), 한동훈(15%)에 이어 단번에 3위 주자로 올라섰습니다. 총선 전 마지막 조사였던 3월 첫째 주보다 조 대표는 4%포인트 올랐고, 이 대표는 1%포인트 올랐습니다. 총선에서 대승한 이 대표로선 약간 아쉬울 법한 성적이죠.
자세히 보면 조 대표는 민주당 지지층에서 차기 지도자감으로 7%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54%를 받은 이재명 대표에 비하면 아직 낮지만, 총선 전과 비교하면 조 대표는 3%에서 4%포인트가 올랐지만, 이 대표는 58%에서 4%포인트가 빠졌네요.
민주당 핵심 지지층인 40대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보입니다. 40대의 조 대표 지지율은 총선 전 4%에서 총선 후 11%로 늘었고, 이 대표의 지지율은 같은 기간 45%에서 38%로 7%포인트 빠졌습니다. 조 대표는 민주당의 텃밭인 광주·전라에서 차기 지도자로 14%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총선 전(7%)보다 2배 늘어난 수치입니다. 같은 기간 이 대표도 지지율이 30%에서 37%로 늘었습니다만, 같은 야권 내에 두 자릿수 지지율의 경쟁자가 생긴 것이 반갑지는 않을 겁니다.
한 민주당 의원은 “조 대표가 22대 국회에 입성하면 임종석, 송갑석 등 민주당의 친문, 호남 출신 원외 인사들이 자연스레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이조제이의 시간이 왔다”고 했습니다. 조국으로 이재명을 제압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거죠. 문재인 전 대통령이 총선 승리 후 사저로 찾아온 조 대표에게 “정권 심판의 바람을 일으켰고 범야권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고 격려한 것도 영향이 있을 겁니다.
이 대표와 조 대표는 22대 국회 개원 후에나 공식적으로 만나 대화할 것이라 합니다. 192석의 거야 수장이 된 두 사람이 앞으로 어떤 관계를 이어 나갈지 벌써 흥미진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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