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 타히티섬으로 간 후기 인상파 화가로 익숙한 폴 고갱(1848∼1903)은 원래 프랑스 파리에서 고소득을 올리는 주식 중개인이었습니다. 부업이었던 예술 작품 거래로도 짭짤한 수익을 내고 있었죠. 그러다 1882년 파리 증권거래소가 폐쇄 직전까지 가는 등 프랑스 경제가 최악의 상황을 맞으면서 그도 위기에 처합니다. 이런저런 일을 해봤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고, 결국 고갱은 1885년 덴마크에서 함께 있던 가족을 뒤로하고 홀로 파리로 떠나 전업 화가가 됩니다. 5년 뒤 고갱이 그린 정물, ‘창문 앞 과일 그릇과 맥주잔’은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수수께끼 가득한 그림가장 먼저 거슬리는 건 오른쪽 아래 그려진 맥주잔과 칼입니다. 그 옆 과일은 입체감을 뽐내며 그림 밖으로 쏟아질 듯 묘사되어 있는데, 맥주잔 혼자 어두운 방 안에 놓인 듯 짙은 색입니다. 빛이 전혀 없어 마치 종이를 오려서 세워 놓은 듯 납작하게 그려져 있죠. 그 옆 칼 역시 기울어진 각도가 아니었다면 입체감을 전혀 느낄
현대미술을 비롯한 문화·예술의 다양한 영역에서 ‘정체성’이라는 주제는 끊임없이 다뤄지고 있습니다.‘세계에서 가장 비싼 사진’을 찍는 신디 셔먼의 각양각색 자화상부터, 루이스 부르주아가 복잡한 어린 시절에서 영감을 얻은 거대한 거미 엄마, 흑인 여성이 겪은 차별의 역사에 자신의 모습을 겹친 카라 워커의 설탕 조각까지.많은 예술가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삶의 많은 문제를 이해하는 실마리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이 비슷한 얼굴을 하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동일한 정체성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한국 사회에서 ‘정체성’이라는 말은 다소 멀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랬다는 걸 이번 캐나다 몬트리올에 다녀오면서 알게 되었는데요.한국계 큐레이터인 한지윤 씨가 예술 감독을 맡은 제18회 모멘타 비엔날레를 지난달 25일부터 29일까지 다녀왔습니다. 현장 분위기를 소개합니다.약탈한 땅 위 이민자의 나라우리 미술관은 동의 없이 넘겨진 토착민의 땅
행복한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날, 독자 여러분께 인사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아름다운 결실을 거두어들이는 가을이 성큼 다가왔네요.결실은 한 시절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순간이기도 하죠.연휴 동안 한 해를 돌아볼 독자 여러분을 위해 안젤름 키퍼의 ‘가을’을 첫 사진으로 준비해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대전의 문화공간 헤레디움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전시에 관한 이야기는 추후에 천천히 다루기로 하겠습니다.오늘은 지난 시간 동안 독자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감상을 ‘다시 보기’로 모아보았습니다.제가 영감한스푼을 하기 전 ‘김민의 그림이 있는 하루’ 시리즈를 연재했었는데요.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을 독자 여러분의 댓글로 구성한 적이 있답니다. 그때 저도 하나하나 돌아보며, 우리가 그림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다고 느껴서 지금까지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올해 ‘영감한스푼’ 구독자 여러분은 마음속에 어떤 예술을 품었는지, 한 번 같이 돌아보겠습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속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9월 20일을 기준으로 이 전시를 30만 명 넘는 분들이 관람했다고 합니다. 10월 9일까지 전시가 계속되니 이제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그동안 영감한스푼에서는 총 4개의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목록을 참고해주세요.파산한 화가의 자화상, 후회는 없다(렘브란트)존 컨스터블과 영국 미술기관의 전략고흐가 슬픔에 잠겨도… 그를 지켜준 사람들에두아르 마네가 사랑한 삶의 순간들이번엔 인상주의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작품, 폴 고갱의 정물화를 감상해보겠습니다.수수께끼 가득한 그림고갱이 프랑스 파리를 떠나 브리타니에 머물던 시절 그렸던 이 정물은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가장 먼저 거슬리는 건 오른쪽 아래 그려진 맥주잔과 칼입니다. 이들 옆 동글동글한 과일들은 입체감을 뽐내며 금방이라도 그림 밖
‘반짝이는 것. 화려한 것. 비싼 것.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 미술에서 가장 쉽게 관심을 받는 이야기는 이런 것들입니다. 덕분에 아트페어 기사를 쓰게 되면 어떤 작품이 얼마나 비싼 가격에 팔렸고,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페어를 찾았으며, 그 안팎에서는 또 얼마나 화려한 파티들이 벌어졌는지를 다루게 됩니다. 이번에는 좀 더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한남 나이트, 디너파티, VIP 오픈…. 영어 단어들로 장식된 시간을 지나고 난 뒤의 차분함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공유합니다.반짝이는 것을 좇는 사람들 “한국에서 1년 동안 마실 샴페인의 절반은 이번 주에 소비된 것 같아요.” 프리즈 서울(6∼9일)이 막을 내릴 무렵인 8일 어느 갤러리스트가 제게 한 말입니다. 5일부터 7일까지 갤러리들이 나눠준 술과 음식은 물론이고 미술계 관계자들이 참석했을 수많은 식사와 파티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느다란 샴페인 잔에서 수직으로 피어오르다 사라지는 거품처럼, 아트
가지런한 도로 위를 나란히 달리는 버스. 그 안에는 좌석들이 줄지어 놓여 있고, 승객들이 차곡차곡 앉아 어디론가 떠나고 있습니다. 버스의 위로는 동그라미가 질서정연한 전광판, 코카콜라 광고판이 보이지만 검은 무늬가 시선을 왼쪽으로 흐르게 만들고 있죠. 우리의 눈은 이 그림에서 가장 큰 형체, 벌거벗은 붉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이 사람은 마치 도시의 그 모든 풍경 밖에 서서 ‘아웃사이더’인 것처럼 굳은 채 오른쪽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가지런한 도시의 질서 속에 도저히 자신을 담을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죠. 그의 오른쪽 아래 또 다른 화려한 색깔의 인물도 버스 사이를 가로지르며 야성적인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서용선 작가(72)가 1989년, 1991년에 걸쳐 그린 ‘도시-차 안에서’입니다.벼락처럼 떨어진 도시 속 군상들서용선의 1980년대 초반부터 최근 작품까지 70여 점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이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습니다.그간 서용선
반짝이는 것. 화려한 것. 비싼 것.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미술에서 가장 쉽게 관심을 받는 이야기는 이런 것들입니다.덕분에 아트페어 기사를 쓰게 되면, 어떤 작품이 얼마나 비싼 가격에 팔렸고,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페어를 찾았으며, 그 안팎에서는 또 얼마나 화려한 파티들이 벌어졌는지를 다루게 됩니다.저 역시 그런 기사를 썼지만..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좀 더 솔직한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한남 나이트, 디너 파티, VIP 오픈, 삼청 나이트…. 영어 단어들로 장식된 시간을 지나고 난 뒤의 차분함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공유합니다.반짝이는 것을 쫓는 사람들“한국에서 1년 동안 소비할 샴페인의 절반은 이번 주에 쓰였을 것 같아요.”프리즈 서울의 6일 개막을 전후로 한 ‘아트위크’의 막바지인 오늘 어느 갤러리스트가 제게 한 말입니다.5일부터 7일까지 한남동, 청담동, 삼청동 갤러리들이 나눠준 술과 음식은 물론, 미술계 관계자들이 참가했을 수많은 저녁 식사와 파티를 생
여러분 안녕하세요?오늘은 2주 전 ‘이중섭, 그 사람’을 쓴 오누키 도모코 인터뷰에 이어 이중섭의 편지화에 관한 책 ‘이중섭, 편지화’를 쓴 미술사학자 최열과의 인터뷰를 전해드립니다.최열은 이중섭에 관한 주요 문헌들을 토대로 쓴 ‘이중섭 평전’을 2014년 발간했고, 오누키 도모코가 이중섭에 관해 취재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요.이번에는 왜 이중섭의 편지화에 주목했는지, 그 특징은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작품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편지화김민(민): 이중섭의 편지화에 집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최열(열):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편지화를 소장품에 넣기 전에는 편지화가 작품이 아니라고 소장가들이 생각했습니다. 그 후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회고전을 할 때 이중섭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화제가 되면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죠.이 전에는 편지화에서도 이를테면 아들에게 쓴 편지에 ‘태성군’이라고 적혀 있다면, 이 글을 지우고 마치 그림인 것처럼
그레타 거위그 감독의 영화 ‘바비’가 인기를 끌면서 분홍색이 유행이라고 하죠. 오늘 만날 이 그림에도 분홍빛이 가득하지만, 그 분위기는 ‘바비’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림 속 분홍은 거칠고 새빨간 선을 만나 피가 흐르는 살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죠. 누군가 쓰러져 더미처럼 쌓인 듯 이 그림의 뒤편에는 구두가 한가득 장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앞에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운 얼굴이 눈만 껌뻑이며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죠. 팔도 다리도 없는 이 형상의 배 위에는 케이크가 잔뜩 놓여 있습니다. 이 작품은 미국의 화가 필립 거스턴(1913∼1980)이 1973년 그린 ‘그리기, 담배 피우기, 먹기’입니다. 얼핏 보면 귀여운 것도 같지만 자세히 보면 섬뜩한 이 그림에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요? “미국 추상은 사기다”거스턴은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1913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1919년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습니다. 이때 미국에서는 흑인과 유대인을 상대로 잔혹한 테러를 자행했던 KKK단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바비’가 인기를 끌면서 분홍색이 유행이라고 하죠. 오늘 만날 이 그림에도 분홍빛이 가득하지만, 그 분위기는 ‘바비’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림 속 분홍은 거칠고 새빨간 선을 만나 피가 흐르는 살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죠.누군가 쓰러져 더미처럼 쌓인 듯 이 그림의 뒤편에는 구두가 한가득 장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앞에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운 얼굴이 눈만 껌뻑이며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죠. 팔도 다리도 없는 이 형상의 배 위에는 케이크가 잔뜩 놓여 있습니다.이 작품은 미국의 화가 필립 거스턴(1913~1980)이 1973년 그린 ‘그리기, 담배피기, 먹기’입니다. 대충 보면 귀여운 것도 같지만 자세히 보면 섬뜩한 이 그림에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요?“미국 추상은 사기다”거스턴은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1913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1919년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습니다. 이때 미국에서는 흑인과 유대인을 상대로 잔혹한 테러를 자행했던 KKK단이 기승을 부리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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