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종로를 걸어가는데/그가 다가와 한마디 한 거예요/이것 봐 하룻밤 놀지 않겠어/그리고 칙, 담배를 피워 물었지요」.
시인이자 작가인 장정일의 시 「그녀」 중 한 구절이다. 장정일이 이 시에서처럼 그랬을 리는 없겠지만 장정일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칙, 담배를 피워무는 그의 위악적인 「귀여운 악동」 같은 모습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 너무 발빠른 「외설」 굴복 ▼
그는 햄버거 만드는 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으면서 햄버거를 비웃고, 험프리 보가트나 실비아 플라스에 주목하면서 미국을 비웃고, 왈츠나 룸바나 탱고를 추는 여자를 좋아하면서 짐짓 칙, 담배를 피워 물며 왈츠나 탱고를 비웃는다. 짐작하거니와 그는 아마도 문화의 중심에 서고 싶은 욕망과 문화의 중심을 깨뜨리고 싶은 욕망 가운데에서 끝없이 분열하며 떠돌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최근 명망있는 어느 출판사가 책으로 펴냈다가 간행물윤리위원회(간륜)와 음란폭력성조장매체대책위(음대위)의 문제제기에 황급히 회수한 장정일의 최근 소설 제목이다. 외설이냐 예술이냐라는 식의 질문은 그 진부한 상투성 때문에 이제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런 식의 공허한 관념적 담론에 일부 식자층이 매달려 있는 사이, 대중들은 이미 외설과 예술의 이분법적 편가르기 수준을 넘어서서 그 두가지를 함께 수용하고 있다.
우선 놀라운 것은 이번 「장정일 사건」의 시발부터 「결말」까지가 너무나도 신속 명쾌하게 진행돼 왔다는, 그 과정의 단순성이다. 음대위의 출판사에 대한 책의 회수 및 폐기요구, 간륜의 제재조치, 그리고 출판사의 발빠른 굴복과 사과성명 등이 그것이다. 불과 며칠 사이에 진행된 한 문학작품에 대한 사형선고와 사형집행은 너무도 일사불란하며 마치 하나의 폭력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 그 과정의 어느 구석에서든지, 작가 자신의 변론이나 전문가들의 책임있고 진지한 논의가 수반됐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특히 압권이라 할 만한 것은 출판사의 기민한 항복조치다. 출판사측은 간륜의 심의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문제의 책을 회수하겠다고 나섰고 그것도 모자라 「소재와 묘사의 음란성 등으로 문학계의 논쟁범위를 벗어남에 따라」 그동안 판매한 책에 대해서도 무조건 책값을 환불해 주겠다며 「사과광고문」을 내고 있다. 출판사는 「문학계의 논쟁범위를 벗어났다」는 판정을 문학계의 어디에서 판정받았는가. 명망있는 출판사가 아무런 사전검토 없이 이 소설의 출판을 결정했단 말인가.
▼ 편집권 헌신짝 버리듯 ▼
물론 간륜의 일방적인 음란판정에 무조건 출판사의 등록취소가 결정되는 과정의 횡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출판사의 살기 위한 이 발빠른 굴복은, 「음란성」에 대한 아무런 사전검토 없이 「장사가 될 만해서」 출판을 한 것보다 오히려 더 독자나 작가에겐 양식을 저버린 배신이 아닐 수 없다.
편집권은 선택과 신념을 기반으로 한 가치있는 권리다. 무엇이든 장사가 된다면 출판부터 하고 보자는 것도 편집권의 위기지만, 이미 검토 끝에 출판한 것을 변변히 변론조차 못하고 스스로 헌신발 버리듯하는 것도 편집권의 위기다. 명망있는 출판사의 운명을 「등록취소」로 간단히 사형대에 눕히는 「잘못된 구조」를 고려해도 그렇다. 장정일이 불쌍하다. 또한 춘향이만한 기개도 없는 언필칭 출판대국, 이땅의 출판편집권이 불쌍하다.
박 범 신 <작가·명지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