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일이다. 화창한 휴일낮 딸과 함께 친구를 만나러 외출을 했다. 레스토랑에서 「볼 일이 급하다」는 친구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가서 옷을 추슬러주다가 그만 남방셔츠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삐삐가 변기속에 퐁당 빠져버린 것이다.
급한 마음에 얼른 건진 것까지는 좋았다. 꺼림칙하다는 생각에 무심코 삐삐를 물로 말끔히 헹군 다음에야 아차 싶었다. 하지만 물먹는 하마도 아닌 물먹은 삐삐가 온전하랴.
결국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몰상식하다」 「구제불능이다」는 비판과 진단을 받아야 했다. 낡은 삐삐는 명퇴(?)하고 새 호출기를 사는 것으로 막이 내리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돈은 무척 아까웠지만 광역수신도 되고 호출음이 열가지나 되는 깜찍한 삐삐가 생겼다고 흐뭇해한 것도 잠시. 작은 수첩크기에 빽빽히 쓰여진 제품설명서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도무지 이해가 안됐다. 모드 알람 리마인더 등 무슨무슨 기능이 많은 만큼 작동법도 복잡했다. 이리저리 눌러보다 마침내 포기할 수밖에.
『번호 확인과 지우는 두가지 기능만 가르쳐 드릴 테니 괜히 이것저것 손대지 마세요』
후배의 신신당부를 들으며 구형이라 볼품없이 크기만 크고 소리도 「삐리릭」 한가지라고 구박했던 헌 삐삐가 새삼스레 아쉬워졌다. 호출기능만 있으면 됐지 뭐하러 곁가지를 덧붙여 헷갈리게 하지. 혼자서 중얼거리다 「단순해서 좋은 게 어찌 삐삐뿐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로부터 선물받은 「말하는 전자사전」은 사용설명서만 꼭 1백페이지였다. 가전제품도 그렇다. TV와 비디오 오디오 리모컨을 들여다보면 작은 단추만 촘촘히 수십개인데 그 많은 걸 어디에 쓸까 의심스럽다. 오죽하면 노인대학에서 비디오작동법 강좌를 열었을까. 요즘 외국에선 단순기능의 제품을 다시 선보여 인기라는 걸 보니 사람마음은 다 비슷한가보다.
기능이 다양해진 만큼 세상살이도 복잡해졌다. 문명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첨단 제품들. 정작 인간은 제대로 활용도 못하면서 「하이테크」에 현혹되고 집착한다.
세상이 빨라지면서 오히려 단순한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돌리던 투박한 검은 전화기가 그립다.
고미석<생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