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시작한 우리나라의 조선산업은 현재 일본과 세계 수위를 다툴 정도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최근 몇년 동안의 세계 조선업체 선박건조 실적을 보면 국내 조선업체가 세계 1,2,3위를 독차지할 정도로 업체 규모면에서 이미 일본을 능가하고 있다.
▼ 조선업 일본식용어 많아 ▼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위상이 이렇게 높아졌지만 조선소 곳곳에 박혀있는 일본의 잔재는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있다. 건조공법 관리방식 등 많은 것을 일본으로부터 배워 사용해온 탓인지 조선소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일본식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높은 편이다. 물론 바꾸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워낙 오래 전부터 타성에 젖어 써온 말이고 조선업에서만 쓰이는 특수한 용어들은 대체할 만한 적절한 우리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조선산업뿐만 아니다. 건설업을 비롯한 산업계 전반과 법조계 학계 등 사회 전체적으로 퍼져있는 일본어와 일본식 한자어의 수적 규모는 의외로 많다. 일례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고 있는 가처분 건폐율 노임 부락 등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 말들이 일본식 한자어이고 일부는 우리 고유어를 밀어내고 자리잡은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국어사전에 실린 표제어를 보면 70%가 한자어, 6%가 서양어, 5%가 일본어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자어 가운데에서도 일본식 한자어가 35%에 달해 우리말 가운데 일본말이 30% 가까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순수한 우리말은 19%에 불과하며 그나마도 새로 도입되는 외래어에 밀려 설 땅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특히 외래어나 외국어는 세련된 말처럼 보이고 순수한 우리말은 촌스럽고 구식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더욱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세계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의 말이 섞이지 않고 순수한 자기 말만을 유지해 온 나라는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주변국에 둘러싸여 오랜 역사를 이어온 나라의 말과 글에 외래어가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외래어를 많이 쓴다든지, 우리말에 외래어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든지 하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외래어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우리의 자세다. 한 나라의 말과 글은 그 나라의 문화를 담는 그릇이며 그 나라의 혼(魂·얼)이라고 한다. 깨진 그릇에는 물을 담을 수 없듯이 얼이 살아 있지 않으면 그 민족 본연의 정신은 존재할 수 없다.
▼ 정신유산부터 살려야 ▼
현정부들어 「역사 바로세우기」차원에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일제가 전국 각지에 박아 놓은 쇠말뚝 뽑기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 바로세우기」가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바로잡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들 가슴과 머릿속에 남아 있는 사대적인 과거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 바로세우기」일 것이며 그 시작은 우리의 말과 글을 바로 잡는 것이 돼야 한다.
올해부터 시작된 초등학교 영어교육도 어려서부터 외국의 언어를 습득하고 문화를 조기에 경험한다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말과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어린이들에게 하는 교육인지라 자칫 우리 고유의 것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걱정될 따름이다.
우리나라 조선산업이 최근 25년사이에 비약적으로 발전해 우리에게 기술을 제공한 국가들을 제치고 세계최고수준에 이르렀듯이 우리 말과 글도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고 소화해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이러한 정신적인 힘을 키우는 것이 어쩌면 경제를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신영균<대우중공업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