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金대통령의 담화를 보고

  • 입력 1997년 5월 30일 19시 59분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이 92년 대선자금문제에 대한 입장을 대국민담화 형식으로 발표했다. 담화는 「정치개혁에 관해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주로 고비용 정치구조 개혁을 위한 구상과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대선자금에 관해서는 정치풍토와 선거 관행상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는 점은 막연하게 시인하면서도 자금내용은 집계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밝히지 않음으로써 국민적 의혹을 간단히 뛰어 넘었다. 한마디로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입장표명이다. 거기에다 문제는 대선자금을 밝히는 것이 국민 「정서」에 영합하고 타협을 겨냥한 정직하지 못한 태도라는 인식이다. 과거를 털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국민적 열망에 답하는 것이 영합이자 타협이라면 그 시국인식의 정체는 무엇인가. 대통령은 또 92년 대선자금문제는 정치권 모두 반성하고 참회해야 한다고 공동책임론을 폈지만 이는 왜 유독 대통령의 대선자금문제가 의혹의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지금 나라는 끝없이 표류하고 있다. 그 밑바닥에 가로 놓인 것이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는 대선자금 원죄였다는 것이 한보사건과 金賢哲(김현철)씨 비리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대통령이 대선자금을 밝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대통령이 야당측의 주장대로 한보에서 받은 돈, 盧泰愚(노태우) 전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돈을 포함해서 92년 대선자금의 조달처와 사용처 내용을 소상하게 공개하는 것이 당면한 국가이익을 위해 반드시 바람직한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 점에 대해서 보다 진솔한 자세로 국민을 설득하여 이해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정치개혁이 정치권의 근시안적 당리당략으로 좌초된다면 불가피하게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발언을 덧붙이는 역공을 취하기도 했다. 이 중대결심에 관한 부분은 진의를 분명히 밝히지 않는 한 엄청난 국민적 오해와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은 대선자금에 관해 책임질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회피하지 않겠다는 말로 퇴임 후 책임을 완곡하게 시사했지만 이것으로 민심을 되돌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대통령이 대선자금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검사 임명이나 국정조사 또는 청문회로 몰고가는 것이 현명한 일일지는 신중히 판단할 일이다. 더구나 5개월째 표류를 계속하고 있는 나라를 이대로 방치해둘 수는 없다. 결국 불법을 시인한 대통령과 함께 나라를 이끌고 가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대선자금문제는 일단 괄호 속에 넣고 경제 살리기와 정치구조 개선을 국가적 의제의 우선순위에 놓는 것이 바람직할지 모른다. 국가가 파산하고 나면 대통령의 대선자금 의혹을 가려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통령의 담화는 이 마지막 국민적 합의의 기회를 놓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불만스러운대로 이 시점에서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다. 대선자금 등을 둘러싼 법적 정치적 책임문제와는 별개로 담화에서 밝힌 바 정치개혁을 추진하고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고 경제를 회복시키며 대선을 공정하게 관리하는 일은 또 그것대로 살신(殺身)의 의지로 실현해야 한다. 재임중의 정치적 영향력이나 앞으로의 거취를 염두에 둘 것이 아니라 그가 담당했던 한 시대를 어떻게 마감하고 새 시대를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비운 자세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과연 무엇인지를 판단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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