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자동 기록 장치(Flight Recorder)를 「블랙박스」라고 부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검은 색 상자로 믿고 있다. 하지만 대한항공기 괌추락사고로 자주 텔레비전 화면에 비춰졌던 블랙박스의 실물을 보면 분명 그것은 검은 색이 아니었다. 검기는커녕 정반대의 밝은 오렌지 빛이다.
▼ 겉만 보고 믿는 어리석음 ▼
대한항공기가 추락한 니미츠 힐의 피와 잿더미속에서 갑자기 영웅 하나가 탄생했다. 누구보다도 먼저 용감하게 현장에 달려가 극적으로 일본 소녀의 생명을 구출한 구티에레스 괌 지사이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비춰진 그의 구출작업을 보면 누가 보아도 영웅 대접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못가 그 「영웅」의 얼굴은 갑자기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괌지사는 현지 경찰을 동원, 자신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한 연방소방대원의 진입을 제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활약상을 홍보하기 위해 전속 카메라맨까지 투입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사가 달린 긴박한 시점에 지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첨단 구조장비를 갖춘 소방대원의 진입을 의도적으로 지연시켰고 이때문에 우리는 귀중한 생명을 더 구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 괌 주둔 연방 소방대장의 주장이다.
그렇다. 「블랙박스는 검지 않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겉만 보고 믿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우리는 배웠다.
또 대한항공기의 추락소식과 함께 미국의 언론들은 사고의 원인을 일제히 조종사의 실수로 몰고 갔다. 독일 일본 심지어 한국의 일부 언론까지도 맞장구를 쳤다.
미국의 어느 영향력이 있는 TV 방송은 이번 사고와 관계가 없는 한국의 모든 항공기의 기장들까지 싸잡아 그들의 권위주의 문화가 항공사고의 원인이라고 했다. 기체 결함이나 조종미숙 같은 것이라면 그래도 개선할 희망이 있지만 그것을 한국 문화의 탓이라고 한다면 종신형 선고나 다를 게 없다. 문화는 일조일석에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안되어서 조종사 과실이라고 몰아세웠던 언론들이 얼마나 실상과 먼 보도를 한 것인지 밝혀지기 시작했다.
아가냐 공항의 관제시스템과 비행기 착륙 유도장치의 소프트웨어에서 오류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일본항공기가 착륙에 실패할 뻔한 사고로 한국 항공사의 과실에 무게를 실어 보도했던 일본 언론들이 멋쩍게 되어버렸다.
▼ 이 원리를 大選서도… ▼
그렇다. 「블랙박스는 검지 않다」. 우리는 일방적인 보도만을 믿고 이미지를 굳혀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번 대한항공기 추락 사고의 참사속에서 우리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말이나 겉만 보고 믿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이다. 「블랙박스는 검지 않다」. 이 충격의 원리를 잘 살리면 이번 대선에서 자신의 귀중한 투표권과 선택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 하는 판단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어령 <이화여대 석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