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쓰마야키의 심수관가(沈壽官家)는 일본에 심은 조선의 도예를 대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으로 끌려간 지 4백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민족명을 그대로 쓰고 있고, 또한 조선 도공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도업을 이어온 가문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동아일보사와 일민미술관이 정부수립 5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개최하는 ‘4백년만의 귀향―일본 속에 꽃피운 심수관가 도예전’은 우리나라 도예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으로 생각한다.
▼ 日 기술자우대의 산물 ▼
조선의 도예가 일본에서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필자는 92년과 97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규슈의 남단 가고시마(鹿兒島)현 사쓰마야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나에시로가와(苗代川)의 수관도원(壽官陶苑)을 찾았다. 이때 심수관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은 일본에서 꽃피운 조선 도예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문화의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겠지만 도예는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부분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심지어 정치체제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이 심수관가의 사례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오랫동안 봉건제도를 거친 일본에서는 지방자치제의 전통이 깊이 뿌리내렸다. 사무라이 지배층이 주도하는 번(藩)은 사실상 각기 하나의 독립된 작은 나라였다. 일본 전국이 수많은 번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좋은 상품을 생산해서 다른 번에 파는 식의 교역은 정치적인 동맹관계에 못지 않게 번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전략이었다. 바로 이때문에 능력있는 기술자나 전문가들을 찾아내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번의 경제를 진흥시키는 것이 번주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조선 침략에 나선 번주들이 조선의 도공들을 탐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사실 임란 때 끌려간 우리의 기술자들은 도공만이 아니었다. 금공(金工) 석공(石工) 목공(木工) 자수장(刺繡匠) 등을 포함한 ‘기술자 사냥’이 이뤄졌다. 그들을 끌어간 번주들은 좋은 상품을 생산해내도록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도공들의 경우 번주들은 좋은 흙을 찾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안심하고 도예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마련해주었다. 이런 환경은 기술자들을 천시한 조선의 문화와는 달랐다. 그들은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으면서’ 생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기술이 일본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옥(玉)이 생산되었지만, 일본에는 옥이 없었다. 변색되지 않는 귀중한 보물로 일본 사람들은 값비싼 명작의 도자기를 찾았다. 이런 일본 사람들의 취향도 조선의 도예가 일본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는 데 기여했을 것이라는 점이 심수관옹의 견해다.
▼ 한국문화 재발견 기회 ▼
이런 문화적인 풍토에서 조선 도공의 후예들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은 점차로 일본화의 길을 걸었다. 초기의 소박한 조선식 도자기들은 점차로 다채롭고 화려한 형식으로, 정교함의 극치로 치닫게 되었다. 번의 전폭적 지원과 함께 상업적으로 성장한 일본의 도예는, 돈벌이하려는 아무런 욕심도 없이 마음을 비운 채 그야말로 ‘무심무욕(無心無慾)’의 상태에서 관요(官窯)중심으로 전개돼온 조선 도예와는 분명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인 뿌리는 깊어서 4백년 심수관가의 도예에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근래에 와서 조선식 옹기 기법을 과감하게 도입한 작품들을 내놓은 것은 한국 문화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수관도원의 전시장에서 특히 눈에 띄는 한국의 독특한 그릇인 옹기의 색깔과 형태를 채용한 듯한 작품들과 함께 정원의 여기저기에 세워놓은 한국 단지들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번 ‘심수관가 도예전’은 한국 문화와 일본문화가 만나 어떤 예술 세계를 만들어냈는지를 읽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문웅(서울대교수·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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