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장터에서 남안교 긴 다리를 건너 산자락 하나를 돌아가면 양지바른 언덕바지에 슬레이트 지붕의 외딴집이 나오는데 여기가 이효석이 살던 집으로 뒤란엔 ‘문학의 해’에 세운 작은 대리석 기념비가 하나 놓여 있다.
그런 평창군 봉평면이 이효석의 ‘죽은 몸’을 내쫓아 9월3일 아무 연고도 없는 파주 실향민묘지(동화경모공원)로 이장된다고 한다.
사연인즉, 평양에서 서른다섯 나이에 요절한 이효석의 유해는 고향 선산에 안장되었으나 73년 도로공사로 용평면 장평리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또 여기에도 길이 생겨 작년 겨울엔 무덤 밑동이 잘려나가는 수난을겪게 됐다는 것이다. 그때 군(郡)에서 국유지인 줄 알고 내준 묘역이 개인소유지였기 때문에 이효석의 시신은 졸지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에 친지들이 주선하여 파주에 새 유택을 마련했는데 고향을 떠나 실향민묘지로 옮기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가 함흥출신이므로 이효석도 실향민이라는 것이 그 이유라고.
이런 씁쓸한 얘기가 또 어디 있는가. 고향을 빛내준 분을 내쫓는 강원도는 뭐하는 곳이고 평창군은 뭘하고 있는가. 또 이효석이 고향을 잃었으면 평창을 잃은 것이지 함흥은 무슨 함흥인가.
요즘은 지자체에서 저마다 고향의 상징적 인물을 기려, 심지어 소설속의 홍길동을 놓고 강릉과 장성이 다투고 있고, 흥부의 집이 남원 운봉면이냐 아영면이냐로 논쟁하다가 운봉에 살다가 놀부에게 쫓겨간 곳이 아영이라고 ‘대타협’을 보기도 했다. 이런 때에 이효석은 고향에서 ‘퇴출’되다니.
하기야 이효석은 살아 생전에도 실향민같은 떠돌이였다. 진부면 ‘곶은골’에서 태어나 봉평 창동리 집에서 정도 없는 계모 밑에서 자라다가 초등학교는 집에서 1백리 떨어진 평창에 가서 그 어린 나이에 하숙을 하며 다녔다.
그리고는 서울로 유학하여 경기고와 서울대 영문과를 다니면서 유진오와 함께 수재 소리를 듣고, ‘칠피단화’에 나비장식을 붙이는 멋쟁이 소설가가 되어 결혼 뒤에는 처가가 있는 함경도 경성에서 교편을 잡다 평양으로 옮겨 왔는데 젊은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실의에 잠겨 있다 이듬해 뇌막염으로 죽었다.
그래서 이효석에겐 고향상실증 같은 것이 있었고 ‘영서(嶺西)의 기억’이라는 수필에서는 “고향 없는 이방인같은 느낌이 때때로 서글프게 뼈를 에이게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바로 그런 고향에 대한 아픔이 역으로 향토색 짙은 ‘메밀꽃 필 무렵’을 낳았던 것이다.
이효석이 살던 봉평 남안동 집은 벌써부터 성씨도 다른 남이 살고 있고 이제는 죽은 나이 환갑이 다 되는 때에 고향땅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는 정녕 죽어서도 이방인인가. 통일이 되어도 돌아갈 곳이 없는 영원한 실향민이 되고 마는 것인가.
유홍준<영남대교수>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