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문호근/관객에게 주고싶은 「선물」

  • 입력 1998년 10월 15일 19시 08분


예술의 전당에는 공연장이 다섯개나 있다. 그래서 저녁 때가 되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돌의 광장’에서 오랜만에 옛친구 정형을 만난다. 아, 오늘 좋은 연극 공연이 있구나. 감나무 밑에 음악원 제자 임군이 앉아 있다. 오늘 누구 음악회지? 구내식당에서 평론가 김선생님이 식사를 하고 계신다. 제자의 무용 공연을 보러 오셨단다.

한낮에는 단체로 전시회를 보러 온 아이들이 미술관 앞에서 왁자지껄하며 뛰어다니고 일요일 오후에는 전통예술을 공연하는 야외무대 앞을 애호가들이 느긋한 걸음으로 오고 간다. 외국인도 더러 눈에 띈다. 참 좋구나, 참 고맙구나, 교통도 불편한데 여기까지 찾아와 주시다니…. 한분 한분한테 머리숙여 절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분들이 오시는 목적이 다 다르다. 많은 분이 한 장소를 이용하건만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별로 없다.

미술을 좋아하는 분들과 고전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이 차 한잔을 앞에 놓고 토론을 벌이는 일도 없다. 공연장의 분위기도 다 다르다. 어느 공연에는 젊은 학생들이, 어느 공연에는 점잖은 분들이, 어느 공연에는 그 분야에 특별한 소양과 학식이 있는 분들만 앉아 있다. 출연자의 선후배나 가족만 박수를 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 나라의 예술이 매우 다양한 형태로 꽃피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연극을, 미술을, 오페라를 보고 즐기고 살면 그뿐이다.

그건 다 각자의 자유다. 그렇다. 예술의 전당은 그런 다양한 문화적 욕구들을 골고루 채워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복합문화공간’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래도 무언가 아쉬움을 느낀다. 각자가 좋아하는 것이 다 다를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적어도 이해라도 해줄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왜 그 음악을 그 연극을 좋아하는지 연유라도 묻고 서로 토론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느닷없이 일자리를 잃은 아버지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찾아왔다가 이곳을 나갈 때에는 새로운 용기를 가슴에 품고 어깨를 펼 수 있다면…, 다음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찾아와 오랜만에 시름을 잊고 온 가족이 환하게 웃을 수 있다면…, 학교를 졸업해도 취직의 길이 막막한 젊은이들이 찾아와 사색과 감동의 시간을 갖고 미래의 꿈을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다면…, 새로운 일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 찾아와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문화 속에서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의 청사진을 머리 속에 그리며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 나가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오고 가던 모든 분이 일년에 몇번쯤은 한 공간에서 울고 웃으며 뜨거운 감동을 같이 나눌 수 있다면…, 우리 사회를 그렇게 통합해 나가는 힘을 우리 ‘예술의 전당’이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오늘도 오고 가는 많은 분을 눈물겨운 감사의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나는 이런 꿈을 꾸어 본다.

문호근(예술의 전당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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