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양희은/내노래와 함께 늙는 사람들

  • 입력 1998년 12월 17일 19시 04분


요즘 나는 매일 대학로에 간다. 바삐 걷거나 친구를 기다리며 서있는 숱한 젊음들을 지나치며 나 역시 바삐 걷는다. 왜? 나도 약속이 있으니까.

‘아줌마 동숭동에서 길을 잃다.’ 31일까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하는 내 콘서트 제목인데 아줌마 아저씨들은 동숭동에서만 길을 잃는게 아니라 혜화동 전철역에서 부터 헤맨다. 그러다가 공연 시간에 오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공연 시작 30분쯤 지나 숨이 턱에 차서 들어오기도 한다.

공연 도중에 호출기나 휴대 전화가 울리는 건 물론이고 아이를 데려온 부부가 교대로 칭얼거리는 아이를 안고 들락 날락 어수선한 분위기지만 절대 어수선하지 않은 집중된 에너지가 그곳엔 있다.

내가 젊었을 때 같이 젊었고 내 체중이 불어갈 때 그네들 허리띠 구멍도 하나 둘씩 늘어났을 터이다. 콘서트 홍보만 해도 그렇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또래 가수들은 포스터 한번 붙였다 하면 반나절이 채 안돼 공연소식이 입소문으로 다 알려진다. 중장년층의 또래 가수들은 포스터의 효과도 없을 뿐더러 1대1 전화문의에 친절히 답을 해도 전화 끊을 즈음이면 같은 질문을 또 하니까 ‘정보 입력’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젊을 때 좋아했던 가수의 공연 소식을 듣고도 ‘꼭 봐야지’ 벼르다가 결국엔 “어머, 끝났대?”하기 일쑤다.

엉덩이가 무겁고 떼지어 몰려다닐 호기심도 없는 그네들이 일상의 한자락을 덜어내어 내 노래를 듣겠다고 와주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귀하고 고맙다. 3대가 나란히 구경온 가족, 팔순 노모와 50대 딸의 외출, 시집간 딸 셋이 함께 온 집, 서산에서 왔는데 공연 끝나고 집에 갈 일이 걱정이라는 주부…. 공연 후에 사인을 해주면서 나는 물어본다. “무엇이 좋았어요?” “분위기요.” “상록수요.” “사랑―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너무 좋았어요.” 등등.

그래도 나는 궁금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 공연을 찾아올까.’

첫날 두아이를 데리고 공연을 보고 간 마흔네살의 주부가 편지를 보내왔다. ‘물론 노래를 듣기 위함이지만 직접 당신의 눈빛이 보고 싶어서 콘서트에 갔습니다. 정말, 삶을 살아온 냄새가 나는 그리고 노래에 그 삶이 묻어나는 사람을 그냥 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많은 아줌마들이 그런 공연에 가고 싶어도 못갈 이유들이 너무 많지요. 그날따라 손님이 온다거나, 시집 제사라든가, 애가 아프거나 등등. 또 그 돈이면 배추가 몇포기인데도 따져보고 에이, 다음에 가지. 그러다가 우리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가지요. 암으로 가고, 사고로 가고, 낙엽따라 가고…. 그래서 그 순간이 바로 마지막인듯 나는 겉옷을 걸치고 아이 손잡고 나섰던 거지요. 무언가를 찾아서 말이에요. 뾰족한 미모의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당신에게는 있다는 것, 사는 것을 아는 바로 그 눈이지요.’

그렇다. 무언가를 찾아서 그네들은 온다. 반드시 내 노래를 듣기 위함만도 아니다. 같이 살아가는 연대,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얘기들을 찾아서 그들은 온다. 대학로에서 지나치는 풋풋한 젊음과는 바꿀 수 없는 삶의 지혜가, 삶이 그렇게 허무한 것만은 아니라는 담담한 위로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잔잔하고 담담한 노래를, 나 사는 동안 열심히 해야겠다.

공연문의 02―3272―2334

양희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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