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이해인/서로에게 선물이 되자

  • 입력 1998년 12월 20일 20시 17분


12월의 정원엔 호랑가시나무들이 빨간 열매들을 잔뜩 달고 겨울바람 속에 환히 웃고 있다. 성탄 카드에서만 보았던 이 나무들을 남쪽에 와서 처음으로 보았을 땐 신기해서 몇번이나 들여다 보곤 했었다.

호랑가시나무 열매를 즐겨 먹는다는 한마리 붉은 새처럼 나의 가슴도 사랑으로 붉어지는 12월. 왠지 마음이 바빠진다. 미루어둔 책상 정리, 편지쓰기, 대청소도 해야겠고, 미처 지키지 못했던 약속도 챙겨야겠고, 성탄편지와 선물도 준비해야겠지.

▼ 돈으로 살수없는 마음 ▼

올해는 유난히 꽃씨 선물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접시꽃씨를, 꽃집 아줌마는 나팔꽃씨를, 해외의 어느 독자 부부는 12가지나 되는 꽃씨 봉투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꽃씨는 얼마나 소박하고 의미있는 선물인지! 언젠가는 씨를 뿌려 꽃 피우는 기쁨을 공유하면 됐지 꼭 되갚아야 한다는 부담이 적기에 선물 받은 마음 역시 꽃씨처럼 가볍다. 우리가 서로 주고받아야 할 선물은 이처럼 작지만 순수하고 조건없는 즐거움을 안겨주어야 바람직하다.

상가에서는 크리스마스 선물 홍보가 한창이다. 선물이란, 특히 예수아기가 태어난 기쁨을 함께 축하하는 의미가 담긴 성탄축제에 우리가 주고 받는 선물이란 부담없이 소박하고 단순해야 할 것이다.

사랑의 마음과 정성을 다한 구체적 표현은 꼭 물건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아픈 이 곁에 묵묵히 함께 있어주는 일, 외로운 이의 말을 정성껏 들어주는 일,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거듭 충고를 들었어도 진지한 노력이 부족하여 고치지 못했던 자신의 결점이나 생활태도를 꾸준히 개선해가는 일 역시 진정한 의미의 선물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너무 많이 쓰고 있는 사랑, 봉사, 나눔이란 말에도 우리는 이미 스스로 식상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럴듯한 좋은 말들보다는 하나라도 실천이 따르는 사랑의 행동이 가장 아쉽고 절실한 때이다.

“… 수녀님, 굶주리는 우리 동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들의 고통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는 뜻에서 하루에 두끼만 먹기로 했어요. 제가 아낀 부분들을 모아 작더라도 정성어린 성금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어느날 해외에서 날아든 친지의 편지 한 통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참사랑의 선물이 어떤 것인지를 나 자신도 잠시 잊고 산 것 같아서였다.

추운 날씨에 습관적으로 난로부터 켜고 싶을 때, 별로 배고프지 않으면서도 간식에 눈길이 갈 때 “정말 꼭 필요한가?”를 자문하며 되도록 절제해 보려 애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추위에 떨고 있는 노숙자들, 극심한 굶주림으로 눈이 퀭한 북한의 어린이들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며 행하는 이런 작은 노력들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믿는다.

해마다 성탄절이나 부활절이 되면 어떤 수도단체나 자선단체에서는 미리 의논을 해서 자기들이 먹을 고기나 과일값을 아껴 그 몫을 따로 떼어 지구촌의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이 많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많은 이가 시름에 잠겨 있는 이때,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가정들이 마음과 뜻을 모아 이런 식으로 이웃을 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약간의 자기희생과 절제가 포함된 이웃사랑은 불쑥 내놓는 성금이나 물건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우리 서로가 과도한 욕심과 이기심을 줄이고 조금만 더 이웃을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한다면, 분수에 넘치지 않게 좀더 검박한 생활을 꾸려간다면 함께 행복한 날이 더 빨리 올텐데…. 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넓은 사랑을 확산시켜가는 노력이 어느때보다도 필요한 지금,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고맙습니다. 따뜻한 마음 그 자체가 저에겐 선물입니다”라고 고백할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선물이 될 수 있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진정 ‘살아있는 사랑의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쯤의 남모르는 희생과 아픔 또한 감수해야 하리라.

▼ 자기희생-절제 담아야 ▼

몇해전 12월 인도에서 만났던 마더 테레사의 사랑 가득한 그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를 향해 그는 힘찬 목소리로 말하였다.

“사랑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희생, 특히 자기희생으로 양분을 취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좋은 것이라면 나는 무엇이든지 기꺼이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 일은 상처를 받게 되더라도 개의치 않고 기쁘게 주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안에 참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이해인<수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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