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에선/미국]김영기/영어식이름 「국제화」아니다

  • 입력 1999년 1월 17일 19시 11분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세계화가 하나의 지상과제로 떠오르면서 한국에서는 이름도 영어식으로 짓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들었다. 어차피 미국인 등 서양 사람들을 주로 상대해야 하는 만큼 알아듣기 쉽게 이름을 고쳐 부르자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서는 이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한국학에 공헌을 많이 한 도널드 맥도널드(Donald Macdonald)교수는 누가 자기 성을 흔히 쓰이는 ‘McDonald’로 쓰면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현재 컬럼비아대에서 ‘세종 석좌교수’로 활약하는 개리 레드야드(Gari Ledyard)교수도 흔히 쓰는 ‘Gary’로 이름을 바꿔 쓰면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두 사람 다 그들의 독자성이 훼손당하는 느낌을 받아서일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렇게 ‘물려받은’ 성(姓)뿐만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이름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주장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미국 노퍽에 있는 해군기지의 한 이슬람교 군목은 개종할 당시 ‘M Malak Abd al Muta’ali Ibn Noel’이라는 긴 이름을 선택했다. 귀에 설고 복잡한데다 ‘노엘(Noel)’이라는 기독교식 성도 들어있어 의미도 상충되지만 종교를 바꾸면서 새로 태어난 자신을 상징하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었다.

여성들도 결혼하면 남편의 이름을 따랐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과거에는남편이‘존 도(John Doe)’이면 부인은 ‘미세스 존 도’라고 불렸지만 ‘미세스 메리 도’와 같이 성만 남편을 따르고 이름은 자기것을쓰다가‘미세스 메리 스미스―도’처럼 자기 성과 남편 성을 붙여쓰는 단계를 거쳐 아예 자기 성만 사용하는 기혼녀들이 늘고 있다. 가끔 부부의 성이 다른 것을 보고 ‘그냥 동거만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보면 정식 결혼한 부부임을 알게 되는 경우가 흔해졌다.

원래 미국에 사는 중국계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의 기독교식 이름을 택했고 본 이름을 쓰더라도 미국 사람들에게 어설프지 않도록 철자법을 영어단어 비슷하게 바꿔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You Chew Gum(당신은 껌을 씹는다)’과 같이 영어로 이상한 조어가 돼 왕왕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중국 유학생들은 대부분 중국 이름을 그대로 쓰고 그전에 바꿨던 사람도 원 이름을 다시 찾아 쓰고 있다. 미국 사회의 개인 존중, 타문화와 종교에 대한 개방의 물결이 외국인들이나 이민자들에게 원래 이름을 되찾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사장님’ ‘선생님’ ‘선배님’ ‘아줌마’ ‘철수엄마’ 등직위나 사회 가족관계의 호칭이 이름을 덮어누르는 사회에서 온 사람은 미국인들이 남의 이름을잘 기억하고 기억하려고 애쓰는 데 놀란다. 미국인에게 자신의 이름이 어려울 것 같아 ‘This is Kim’이라고 말하면 어딘가 자신을 감추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오해받는 수도 있다. 특히 한국에 ‘김’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 미국인들에게는 무의미한 대답이기도 하다.

점차 이름이 한 개인에게 주체성을 부여하는 ‘문화행위’로 인식돼가는 미국을 보면서 한국인들이 이름을 영어식으로 바꾸자는 게 미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국제화’하고는 상당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영기(美조지워싱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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