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 경제난으로 각박해진 세상에는 잔잔한 아름다움과 감동의 가치가 필요하다. 정동극장이 선택한 이윤택 작 ‘어머니’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가 담긴 작품이다.
이 희곡을 읽고 극장의 뜻에 공감한 어느 따뜻한 가슴을 지닌 기업인이 조건없이 상당한 제작비를 댔다.
그때부터 극장과 연출가가 주인공으로 나를 점 찍었던 모양이다. 연극을 통해 어머니의 소중한 가치를 이 메마른 세상에 일깨우고자 했던 극장과 연출가, 기업인 김홍주씨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청원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올 상반기에 무대를 떠나 활력을 축적하고자 했던 결심이 여지없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김홍주씨는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그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다.
대본을 읽으면서 내내 나의 가족사 안에 언제나 우뚝 서있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었다. 처음 극장에서 국내 최장기 레퍼토리로 선택하고 20년 계약을 제의해왔을 때 ‘웬 해프닝인가’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작품에 탐닉하면서 오히려 내 경솔을 책망했다. 마사 그레이엄은 90세에도 무대에 섰다. 진정한 배우는 무대에서 죽기를 원한다.
지난달 27일 첫 무대에 오른 순간 객석을 빼곡이 메운 관객과 나는 서로의 자리는 다르지만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영혼을 위해 정말 많이 울었다.
30,40대 이후 중장년 관객이 주종을 이룰 것이라는 예측도 빗나갔다. 20대 관객층이 40%나 차지했다. 대부분 연극 공연장에는 여성 관객의 비중이 높은 데 비해 이번 연극은 도리어 남성관객이 많다.
세월이 퇴적된 주름진 얼굴 사이사이의 물기를 채 닦지 못한 채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는 50,60대 남성 관객들은 너무 인상적이다.
“잔잔하고 아름답다. 저린 감동에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내게 다가와 하는 이 말들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삭막하고 메마른 세상을 향해 던진 ‘연극 어머니’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이탈리아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는 40대 교포 관객은 한국적 어머니를 소재로 했지만 고리키의 ‘어머니’나 브레히트의 ‘어머니’보다 더 감동적이라며 유럽공연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어머니의 가치를 더욱 필요로 하는 곳이 서양”이라며 두번씩이나 공연을 보고 갔다.
어려울수록 우리는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불시에 강도를 만나도 튀어나오는 첫 말은 ‘엄마야’ 아니면 ‘엄마’일 것이다. 그 엄마가 상징적으로 구현해내는 메시지는 희망이다. 내가 이땅의 배우로서 치열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손숙의 ‘어머니’가 있는 한 나는 앞으로 20년 안에 죽기조차 어렵게 됐다.
극장 관계자들은 볼 때마다 ‘건강에 조심해달라’는 주문이다. 연극 때문에 내 명으로도 살지 말라는 팔자인 것 같다. 연극, 나의 숙명이여.
손숙(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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