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고, 그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조금 떠 있으면 그 일이 쉬워질 것같다. 떠 있으면 당연히 자유로우니까. 현실 때문에 가려진 상상의 세계로의 진입이 쉬워지니까. 현실을 좀더 명쾌하게 바라볼 수 있고, 현실을 명쾌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은유가 가능하다. 은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곧 예술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세계가 일 분, 일 초를 다투면서 빠르게 변하고 인간들은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달려가고 있다.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도 달리고 있다. 달리지 않으면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오늘 날의 인간은 달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라고나 해야할 듯 싶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떠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 떠 있으면 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찰이 없는데 무슨 수로 달릴 수 있겠는가.
미술계라고 해서 이런 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예술의 모호성 때문에 그 양상은 더 복잡하게 펼쳐진다. 몸만 달리는 것이 아니라 정신까지 함께 가야 하니까. 세계가 한마당 처럼 좁아져 지구의 여기저기에서 대량의 국제전이 열리고 동시 다발적으로 비엔날레가 이곳저곳에서 조직되고 있다.
작가들 또한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너무 분주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다. 필자의 졸렬한 경험대로라면 그렇다. 아프리카 저 어디에서 보았음직한 작품이 광주에서 전시될 수 있고 호주의 소 도시에서 보여졌던 작품이 스페인에서 전시되지 말란 법이 없다. 미술 종사자는 유목민처럼 도시들을 떠돌고 작가와 작품도 배로, 비행기로 떠돌고 있다. 모두들 약간씩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듯 하다.
그럼 관객들은 어떠한가. 그들도 분주하기는 마찬가지다. 굉장한 일이 벌어진 내 고장 행사이니 전시장 안팎을 뛰어다녀도 시원치 않다. 빨리빨리 남들이 본 것을 놓치면 큰 손해이므로 달리면서 작품을 본다. 그들은 작품을 보는 것일까? 그렇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들의 표정은 황당하다. 황당하다 못해 무표정하다. 예술작품을 보았다는 감동이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과 작품은 남남인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그 양상은 선진국이나 후진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 이 바쁜 세상에서 예술은 왜 필요할까. 너무 단순화하는 위험이 있겠지만 예술이 인간에게 자신을 한번 뒤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삶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춰주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나는 요즘 자신에게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 내 몸이 텅비어 가벼워졌으면 하는 것이다. 행운의 신이 내게 날개를 선사한다면 달게 받겠다.
그럴 수 있다면 지상 위로 살짝 떠서 유유자적하겠다. 그러면서 ‘너는 누구니’ 라든지 ‘너는 왜 그림을 그리니’ 따위의 질문이나 하겠다. 내게 그것을 바랄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은 ‘왕따’의 행복을 알기 때문이다. ‘왕따’가 행복하다고?
윤석남<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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