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김영민/자연과 함께 하는 생활

  • 입력 1999년 4월 18일 19시 51분


근세 인류사는 자연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과정이었다. 한편 이것은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문명화의 욕심이 지나치자 이윽고 자연 자체의 항전(抗戰)이 잦아진다. 근자 환경과 생태학적 관심이 범지구적 이슈로 부각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한때 인류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했던 자연은 이제 바야흐로 인류사의 중핵(中核)으로 복귀하고 있다.

★물과 친했던 어린 시절★

생태의 문제는 비근한 생활정치의 몫으로 낮아지고 있기도 하다. 비단 학계의 담론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자연친화를 강조하는 이야기를 쉽게 듣게 된다. 그리고 여가 생활이 일상화된 덕도 있겠지만 실제로 인공의 도시에서 나무와 물을 찾아나서는 이들이 늘고 있다.

고향이 바닷가여서 나는 어릴 때부터 유난스러운 친수성(親水性)이었다. 물에 대한 나의 친화감은 나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을 지경으로 지극했다. 수영을 하면 두어 시간씩 나오지 않을 만큼 물과의 교감을 즐겼고 늘 먹을거리하면 해산물을 최고로 치는데다가 서울에 살 때는 한강이라도 찾지않으면 답답해 사족이 오그라들곤 했으니까. 게다가 내 생각마저 ‘물의 상상력’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96년 이곳 전주에 안착하게 되면서 ‘물의 시대’가 끝나가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당연히 이곳의 자연조건이 큰 역할을 했다. 내가 사는 곳은 전주 외곽의 산자락인데 사위는 아직도 농촌 분위기이고 집만 나서면 곧 등산로가 곳곳에 펼쳐져 있다.

★山行으로 건강 추슬러★

이렇게 해서 나는 자연스럽게 물과 멀어지는 대신 나무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물의 미학을 즐기긴 변함이 없었지만 점점 산과 나무의 세계가 내 생활 속에 깊이 삼투(渗透)해 들어오고 있었다. 가벼운 산책으로 시작된 것이, 무엇이든 뿌리를 뽑아야하는 내 편벽으로 곧 습관화되었고, 지난해에 접어들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나무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에는 두가지 계기가 있었다. 우선 건강문제였다. 늘 식생활이 불규칙했던 데다가 특히 근년들어 폭주하는 강연과 원고청탁에 시달리며 책과 컴퓨터를 품고 사는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몸이 삐거덕대는 것이었다. 마치 ‘문명화의 욕심이 지나치자 자연 자체의 항전이 잦아진’ 것처럼 말이다. 나는 별근거도 없이 약을 불신하는 편이라 산과 나무에 기대어 계몽에 지친 내 몸을 다시 추스르기로 작심했다.

우연히 ‘안반수의경’ 등을 포함해서 호흡법을 다룬 여러 책을 섭렵하게 된 것이 또 하나의 계기였다. 나는 이 호흡훈련에 단박 재미를 붙여 맑은 공기를 탐하게 되었고 흔한 좌식(坐式) 대신 산행(山行)을 계속하면서 나름의 경행(經行) 호흡법을 익히는 데 전념하게 된 것이었다. 거의 매일, 심지어 타지역으로 강연을 다닐 때도 새벽마다 부지런히 산을 오르면서 조신(調身)과 조식(調息)에 힘썼다. 실로 작년 한해만 나는 수천 장의 원고를 쓰는 중에 수천 ㎞의 산길을 홀로 걸어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8백45m의 계룡산 정도를 산보하듯 오르내릴 수 있게 되었고 내 이름 속의 ‘빠를’ 민(敏)처럼 같이 다녀본 누구도 나를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날쌔게 되었다.

★百藥보다 신통한 처방★

신통한 소득은 알레르기 비염이 완치된 것이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봄 가을의 환절기이면 살인적인 비염 알레르기로 고생이 심했다. 여러 처방도 속수무책이었고 늘 강간당하는 기분으로 봄 가을을 맞곤 했던 것이다.

산행과 호흡의 동중정(動中靜) 속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지만 여기에 세세히 밝히지 못한다.

‘나무의 시대.’ 대체로 우울한 편인 나는 오늘도 그 시대만은 마음껏 즐기고 있다.

김영민<한일대학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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