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김병종/문화와 예술의 世紀 앞에서

  • 입력 1999년 4월 25일 19시 47분


드골 대통령 시절의 이야기로 전해진다. 경제가 안좋은 때여서 어느날 각료들과의 오찬 때도 온통 경제에 관한 우울한 이야기들뿐이었다. 그때 대통령이 불쑥 물었다. 지금 프랑스에 시인은 얼마나 되지? 뜬금 없는 시인 이야기에 모두들 어리둥절할 수밖에. 누군가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몇명은 될거라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됐어 그 정도면. 아직 걱정할 단계는 아니야. 그는 군 출신이었지만 군대의 힘이나 돈의 힘 못지않게 문화의 힘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제-문화수준의 괴리

프랑스 대통령에 대한 다른 이야기 한토막. 파리에서 활동해온 한 한국화가 전시회에 대통령 부부가 다녀갔다. 하지만 그때 작가는 부재중이었다. 못내 아쉬워하는 작가에게 화랑 주인이 말했다. 또 만나게 되겠죠. 휴일이면 그 양반 부부는 화랑 나들이를 자주 하거든요. 그만큼 문화와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어서 ‘드골 공항’이니 ‘퐁피두 미술관’이니 하는 이름도 생겨났을 터이다. 우리로서는 아쉬운 대목이다.

언젠가 우리도 ‘전두환 미술관’이나 ‘김영삼 음악당’쯤 생겨야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가 생난리를 친 적이 있다. ‘만득이 시리즈’라도 되는 것처럼 좌중이 책상을 치고 웃는 바람에 머쓱해져 버렸던 것이다. 경제 부피가 이 정도 되는 나라에서 문화 예술과 이 나라 대통령을 지내신 어른들과의 줄긋기가 그렇게도 안된다면 이것은 정말이지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천대받아온 우리문화

요새 문화의 세기가 온다고들 떠들썩하다. 전광판에 날짜까지 세고 있는 형편이다. 한 저명한 미래학자는 한술 더 떠 이미 전분야 전영역에 걸쳐 예술가적 상상력이 요청되는 세기로 접어들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문화와 예술이라면 우리는 은근히 자신있는 민족이다. 우리의 천분은 사실 다른 어떤 쪽보다도 그 분야에 월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오랜 세월 방치해 버렸다. 멸시하고 천대하고 혹은 발길질했다. 문화나 예술이 산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더더구나 못했다.

오늘날 프랑스는 현대미술견본시(FIAC)의 닷새 장사로 도요타 자동차가 프랑스에 1년 내다판 자동차값을 웃도는 이윤을 남긴다. 공장 굴뚝의 연기 하나 내지 않고 그런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우리의 예술적 천분을 빼내어 쏠쏠한 재미를 보는 고약한 이웃으로 일본이 있다. 그들은 일찍부터 우리 민간에 뒹구는 막사발이나 목물 석물이며 민화 한점에 이르기까지 비상하게 깃들인 예술성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예술성이야말로 자기들이 까무라치게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것임도 알았다. 그래서 조선인은 천시했지만 조선인이 가진 예술성만은 신주 받들 듯 했다. 아리타(有田)에 산하나를 통째 허물어 세운 한 조선인 무명 도공의 비석을 보라. 나는 신이 아닌 인간의 기념비로 그토록 거대하게 세운 것을 아직 본 적이 없다. 하긴 그들은 임란 때 끌어온 그 도공을 인간이 아닌 도신(陶神)으로 떠받들고 있는 처지이긴 하다.

오사카의 한 조용한 주택가에는 한세기 가까이 조선 도자기만 전문으로 취급해온 화랑이 있다. 그 집의 제6대 사장은 이제 마흔을 갓 넘은 애송이였지만 조선 도자기에 관한 한 세계적 권위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달리 권위가 아니라 현물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긴 힘이었다. 대체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지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는 말로 대신했다. 양도 양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가격이었다. 이삼평류라고 내놓은 것들마다 10억엔 20억엔이 보통이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게 이미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같은 곳에서 그 가치를 검증받은 것으로 결코 지나친 가격이 아니라고 했다.

◆안으로부터 준비해야

지금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고? 무슨 관제행사처럼 그 날짜 세가며 학수고대할 일이 아니다. 본디 문화는 손님처럼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한민족의 삶과 더불어 세월의 앙금으로 쌓이고 꽃으로 피는 것일 뿐이다. 안으로부터 준비하고 창출시키지 못하는 한 남의 문화의 세기가 오고 갈 뿐이다. 또하나의 끔찍한 제국문화, 식민문화를 뒤집어 쓸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미 그런 슬픈 징후는 도처에서 깊어지고 있다.

김병종(화가·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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