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양영순/만화가 꿈꾸던 初心

  • 입력 1999년 6월 10일 19시 27분


얼마 전 한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나와 직접 통화를 원한다는 얘기를 전하며 아이를 위해 조언을 해달라고 말했다. 무척 당황스러운 전화였다. 만화가를 꿈꾸는 아이의 부모로부터 상담 요청을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내 스스로 만화가로서의 경력과 자질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직업란에 만화가라고 명시한지 만 4년도 안되는데다 하면 할수록 재능에 대한 회의가 생겼다. ‘과연 나는 만화가로서의 소양이 충분한가’에 대해 무척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이었다. 만화를 직업으로 삼으면서도 나의 무의식 속에는 만화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이 아직도 존재했다.

도대체 아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선생님들께 물어 보았다. 그 일로 인해 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던 셈이다.

만화가가 되겠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당장이라도 큰 결실이 나올 것처럼 들떠있던 시기를 거쳐 인체 묘사와 독서에 나름대로 열중했던 대학시절…. 94년부터는 “아무도 하지 않은 포르노그라피 만화를 그려보겠다”고 공언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95년부터 3년간 성인만화잡지에 성인용만화 ‘누들누드’를 연재했고 지난해 5권 짜리 단행본으로 펴냈다.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소재를 다룬 만큼 연재할 때나 책을 낼 때나 ‘위험수위’에 대한 논란으로 조용히 넘어가지 못했다.

‘누들누드’는 50만권이 팔리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비디오로 제작돼 한동안 대여순위 1,2위를 다툴 정도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누들누드는 21세기 데카메론’‘외설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자신만의 성을 구축한 작가’ 등 찬사도 쏟아졌다.

하지만 운이 좋아 작품이 널리 알려진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속에서 나는 타성에 젖어 어느새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지냈다. 만화가가 되겠다고 당당하게 말한 그 초등학생 여자아이의 꿈을 위해 직접 전화를 주신 어머니. 만화를 꾸리는 방법론은 부족하더라도 만화에 대한 열정만큼은 그 아이를 이겨낼 자신이 내겐 없는 것이다.

의지와는 관계없이 만나게 되는 장사꾼들과 휩쓸리면서 어느새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버린 내 만화관은 벌써 말라버린 딱딱한 빵같다. 지금 이시간 어느 장소에서 그 누군가는 만화를 통해 꿈꾸고 있을 것이다. 어느 선생님은 “만화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완성체를 꿈꾸는 초라한 아마추어리즘은 언제나 만화를 수단으로 격하시킨다.

술자리에서 한 선배가 “너는 뭔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그게 네 한계야”라고 던진 일침이 다시 한번 각인된다. 순수하고 솔직하게 원고에 충실했던 때를 지나 벌써 누군가를 의식하고 거기에 얽매여 거짓과 위선으로 포장을 하고 돈과 시간 그리고 언제나처럼 시장구조를 한탄하는 전형적인 엘리트 흉내를 내는 내 자신의 모습이 역겹다.

과연 나는 맨처음 만화를 하겠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하던 그 때의 그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가. 다른 위치에서 늘 같은 선상에 있는 나선형의 고리처럼 나는 다시 순수하게 오만해지길 원한다.

다시 그 여자 아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면 “만화라는 건, 만화가가 된다는 것은 말이야…”라고 목소리를 높여보겠다.

양영순(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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