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 내가 다니던 대학입시 학원 옆에 요리학원이 있었다.
그 앞을 지나다니며 요리에 호기심을 갖게 됐다가 결국 요리사의 길로 뛰어들었다. 그 시절 남자가 직업으로 요리사를 선택하려면 적지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요리사 명함을 떳떳이 내놓기 힘든 사회 분위기였다.
본격적으로 요리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요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누구보다 요리사로서 긍지를 갖고 요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하든 게으른 사람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내게 인생을 살아가는 좌우명이나 철학이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 말을 들려줄 것이다.
요리사 초년병 시절에는 육체적으로 무척 고달팠다. 83년 힐튼호텔이 개관할 때 조리사 보조로 입사한 뒤 남보다 앞서가기 위해 몇 배이상 노력했다. 남보다 2시간 먼저 출근해서 청소와 식자재 정돈 등의 일을 했다.그리고 남는 시간에 선배들 어깨 너머로 요리를 배웠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맞아 요리사가 되겠다며 조언을 얻고자 찾아오는 직장인들이 부쩍 늘었다. 그들 중에는 대기업사원 공무원 자영업자들도 있다. 나를 가장 안타깝게 하는 것은 그들이 요리를 단지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직업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지만 요리사로서 성공하려면 반복되는 단순 작업속에서도 요리를 사랑하고 요리와 함께 인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지만 요리사에게는 무엇보다 프로정신이 있어야 한다. 의식주 문화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식문화의 선구자로서 늘 새로운 맛을 찾아 연구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처음부터 요리가 완성되기까지 혼을 기울이는 장인정신, 이것이 최고의 요리사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다. 남이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이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성심성의껏 요리하는 것만이 최고의 요리를 완성하는 비결이다.
또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 요리는 오직 고객이 평가한다. 이 평범한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고객 중에는 음식을 들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지만 따끔한 충고를 해주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 칭찬보다는 비판을 아끼지 않는 분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내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해야만 발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초 나는 요리사들이 선망하는 특급호텔 요리이사가 됐다. 매스컴에서 ‘고졸 38세 요리사 호텔 이사’의 탄생을 뉴스화제로 다루었다. 업계 최연소 조리이사란 수식어와 함께 내 명함에 새겨진 조리이사란 직함은 내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든다.
그러나 장인은 직함으로 평가받을 수 없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진정한 실력을 가진 자만이 인정받는다. 요리사 초년병부터 조리이사까지 모든 조건은 똑같다.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고객이 즐거운 마음으로 맛있게 먹을수 있도록 자기요리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요리사만이 최고의 요리사라 할 수 있다.
나는 머리털이 파뿌리가 될 때까지 요리사의 길을 계속 걸어가련다. 한 명이라도 나를 잊지않고 찾아주는 고객이 있는 날까지.
박효남<서울힐튼호텔 조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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